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1.04 18:37 수정 : 2016.01.04 18:37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 달이 훌쩍 지난 시간임에도 우리 집에서는 아직 콩을 고르고 있다. 겉은 검은데 껍질을 조금만 벗기면 푸른빛이 드러나는 검정콩이다. 가을에 서리가 온 뒤에 수확한다고 해서 서리태로 불리는데, 할머니들은 속파랭이라고도 한다. 주로 밥 지을 때 잡곡으로 함께 섞어 먹거나 흑두부 재료로 쓰이지만, 요즘에는 노화를 막는 데 좋다고 해서 검정콩 중에서는 꽤 귀하게 치는 것이다.

검정콩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꼭 쥐의 눈처럼 작고 검게 생긴 쥐눈이콩도 있고, 서리태만한 크기에도 광택이 있고 속이 파랗지 않은 콩이 있는데 이는 중국산이라고들 한다. 메주콩도 동네마다 특성이 달라 키와 열매의 크기가 다르고 수확 시기도 달라서 옛날부터 그 동네의 날씨와 땅에 알맞게 진화된 콩을 재배해왔던 것 같다. 그런 유전형질의 다양성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반도에 들어온 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1000종 이상의 콩 씨앗을 수집해서 본국으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콩을 고르는 데는 테두리가 둘러쳐진 옛날 밥상이 제격이다. 상 위에 콩을 가득 부어 놓고 벌레가 갉아먹은 것이나 여물지 않은 것을 가려내야 하는데, 농산물을 선별하는 일은 언제나 갈등을 부르는 작업이다. 검정콩은 늦가을에 수확하기 때문에 미처 여물지 못한 것이 많다. 덜 여문 콩은 표면이 불룩하지 않고 양 측면이 평평하거나 움푹해서 상 위에서 잘 구르지 않는다. 벌레 먹은 콩은 가리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덜 여문 것은 버리기에는 아깝고 상품으로 넣자니 소비자에게 미안하다. 이런 것들은 집에서 먹기 위해 따로 고르는데 콩의 성수기는 이미 지나버려서 이렇게 고심하며 골라 놓은 콩이 주인을 만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선별 작업의 어려움은 감자나 고구마, 배추 등을 판매하기 위해 고를 때도 항상 부딪치는 문제다. 크기와 모양이 소비자에게 돈 받고 팔기에 참으로 어중간한 것들 때문이다. 크기는 좋은데 모양이 사납거나, 모양은 좋은데 작거나, 또는 때깔이나 크기는 괜찮은데 벌레 먹은 자국이나 농기구에 긁힌 상처가 있는 경우다. 이 작업을 할 때는 선별 기준이 매우 주관적이어서 일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의 결과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경우가 많다. 또 불특정한 소비자에게 가는 물건을 고를 때보다는 알고 지내는 소비자에게 판매할 때 그 기준이 더 엄격해지는 것을 느끼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일 터이다. 어느 해인가 수확한 감자가 맘에 안 들어 닭에게나 줘야겠다고 말했다가 가까운 소비자에게서 땀 흘려 지은 농산물을 허투루 여긴다며 질책을 들은 적도 있었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전에는 콩 고르는 일을 한동네에 사는 처갓집 어른들께 맡겼다. 그때는 말린 고추를 팔기 전에 꼭지를 다듬는 일처럼 이 일도 허드렛일로 여겼던 것 같다. 많은 농사꾼들 의식 속에는 농사일의 중요도에 위계가 있다는 생각이 있는 듯하다. 땅을 갈고 씨 뿌려서 가꾸고 거두는 일이 큰 일이고 밭에서 김을 매고 생산물을 갈무리하거나 뒤처리하는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일들은 힘이 약한 여자나 노인들 일로 치부되고 낮에 하기에는 농사꾼으로서 어쩐지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콩을 고르면서 이 일 또한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과 내가 한 가지 농사의 처음과 끝을 오롯이 책임졌다는 점에서 조금 더 온전한 농사꾼이 돼 간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아무리 애써 지어 놓아도 갈무리해 두지 않으면 팔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곡식은 사람이 먹어 주어야 제격이다. 밤늦은 시간에 혼자 콩을 고르면서 드는 생각이다. 따로 명상이 필요 없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