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1.12 18:45
수정 : 2016.01.12 18:45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국가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질문을 폭발시켰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에 의해 던져진 이 질문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된다. “주인아주머니,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숨진 세 모녀에게 국가는 무엇이었나? 메르스 사태 당시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그리고 다시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가 있었다. 나라 잃은 상황에서 ‘성노예’로서의 삶을 강요당한 그들에게 국가란 무엇이었나? 피해 당사자들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어떠한 고려도 없는 합의를 “불가역적, 최종적으로” 한 국가는 지금 그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오늘의 우리 국가는 무능하다. 사회의 불평등을 교정할 의지도, 청년들이 마주한 절망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능력도 없다. 작가 박민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먼 자들의 국가’다. 권력에 눈먼 국가에게 국민들은 보이지 않는다. ‘삼성공화국’, ‘재벌공화국’이라는 표현,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의 비유는 국가 없는 시대, 무능한 국가의 시대에 대한 아픈 은유다. 무능한 국가의 시대에 개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최후의 안전판으로 한 채 스스로 일상화된 위기를 통과한다.
어쩌면 위기를 일상화하는 주체가 무능한 국가일 수도 있다. 정부는 주택정책의 실패로 전셋값 폭등의 위험을 불러왔고, 더 쉬운 해고가 가능한 제도를 만들려 하고 있다. 개인과 가족이 그 위기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줄 국가도, 패자부활의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도 없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을 때 국가는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 걸까?” 작가 박민규는 우리를 대표해 묻고 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은 무능한 국가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쌍문동 골목에서는, 한부모 가정에 대한 살핌을, 아픈 사람에 대한 걱정과 간호를, 일터로 나간 사이 아이의 보육을, 집이 경매로 넘어갈 위기를, 남의 식구들의 끼니를,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가난을,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해결해 나간다. 말하자면 쌍문동은 ‘골목 공동체’인 셈이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작동하지 않거나 오작동하고 있는 이 시대에, 쌍문동 골목은 삶의 위기를 지탱해주는 다른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쌍문동 골목의 공동체는 드라마가 제시하는 판타지다. 1988년,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과 비슷한 또래였던 내게는 지금 그리워할 그런 골목 공동체에 대한 기억이 없다. 오히려 <응답하라 1988>이 보여주는 골목 공동체는 과거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다른 사회에 대한 희망이다. 택이의 방이 골목 친구들의 놀이 공간이 되고, 선우네 집이 골목 사람들의 공동 식탁이 되는 모습은 쌍문동 골목의 삶이 지향하는 공동체가 도시 속에서의 ‘마을공동체’의 모습과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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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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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골목 바깥의 위험이 직접적으로 투영되지 않은 쌍문동 골목 공동체의 모습은 미완성이다. 국가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에 ‘마을공동체’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골목의 삶에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국민의 안전과 복지, 삶의 존엄이 스며들어 있을 때라야 진정한 마을공동체가 가능한 것은 아닐까? 무능한 국가를 대체할 다른 공동체로서의 마을공동체가 아니라, ‘동네 안에 국가 있다’라는 표현처럼, 의무와 책임으로서 작동하는 국가공동체와 함께 이를 보완하는 생활공동체로서의 마을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의 삶이 국가에 질문하고 있다. 무능한 국가와 또 그만큼 무능한 정치가 응답하라.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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