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1.14 19:13
수정 : 2016.01.14 19:13
얼마 전 “1등 신문” 부장님의 칼럼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순식간에 끓어오른 적이 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한 에밀 졸라처럼, 그는 어느 중국집을 준열히 고발하고 있었다. 탕수육을 시켰는데 간장을 1인당 하나씩 주지 않고 2인당 하나를 줬다는 이유에서다. 칼럼은 이렇게 끝난다. “그 식당이 어딘지는 밝힐 수 없다. ‘중화’ ‘동영관’ ‘루이’는 아니다.”
“간장 두 종지를 주지 않았다는 그 옹졸한 이유”라고 썼을 정도니까 글쓴이도 자신의 옹졸함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 옹졸한 이유”가 공적 지면에 올라가는 순간 사회문제가 된다는 것을 몰랐거나 무시한 게 결정적 문제지만 말이다. 그의 의도가 칼럼으로 중국집을 ‘조져서’ 심대한 타격을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보다는, 비록 “옹졸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자신에게 어떤 정당성 내지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 문장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설렁탕을 주문했고 설렁탕이 나왔는데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먹은 만큼 돈을 냈는데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게 이 이상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 거래에서 인사를 주고받는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같은, 거의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들이다. 습관적이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악천후를 뚫고 집 앞까지 온 택배기사님께 우린 “고맙습니다, 고생하셨죠”라며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네기도 한다. 부장님이 보기에 이건 이상한 일이다. 그의 위화감은 어떤 지고한 원칙의 위반에서 비롯한다. 요컨대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탕수육 가격을 제대로 지불했는데 왜 사람 수에 맞춰 간장 종지를 주지 않는가. 왜 내가 돈을 내고서 거저 얻은 것처럼 감사해야 하는가. 돈과 재화가 시세에 맞게 오가면 그만이지 왜 쓸데없는 말을 보태야 하나.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뭐 그리 ‘오버’하나 싶지만, 부장님의 사고방식은 그리 놀랍거나 생경한 것이 아니다. 그는 모종의 사고방식을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이라 부르고 싶다. 이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의 정동적 표현은 ‘억울함’이다. 우리 세계는 “말도 안 되는”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소비자라는 정체성,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우리 존재에 중첩된 많은 정체성 중 일부로서,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다만 한정된 맥락과 상황을 벗어나 다른 정체성 영역을 침범할 때, 즉 ‘지배 정체성’으로 결합·확장했을 때 역기능이 나타난다. 과거 개발독재 시기에는 ‘국민’이라는 강요된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을 압도했다. 지금 그 자리를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이 꿰찬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학교의 비리를 공익 제보한 교사에게 그 학교 학부모들이 퍼붓는 격렬한 비난을 보라. “정의라는 가면을 쓴 위선적 행동이 아이들에게 피해가 된다.” “내 딸이 힘들어하니 나쁜 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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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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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탐욕과 이기심으로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다.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은, 악다구니 쓰며 ‘피해자성’을 입증하지 않으면 아무도 누군가를 돌보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기도 한 까닭이다. 억압과 착취를 시정하라는 정치적 요구가 매번 좌절되고 묵살되기에, 그 반동으로 시장의 명령(소비자)과 도덕적·사법적 명령(피해자)이 끝없이 소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피해자 정체성은 각자의 고통을 절대시하는 불행경쟁으로 귀결하고, 그 과정에서 약자와 강자의 실질적 불평등은 ‘평평해져서’ 쉽게 은폐되고 만다. 평등의 과정으로서 정치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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