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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2.29 19:14 수정 : 2016.02.29 19:36

몇 달 전 어느 워크숍에 갔다가 어떤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남성 동성애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감염인을 인터뷰해 그 생애를 기록한 것인데, 한 신문사가 내용을 악의적으로 편집하여 ‘동성애 혐오 보도’에 이용했다. 이에 기록자는 구술자에게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기록 자체를 영원히 봉인하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순간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록 활동을 해본 적이 있어 그 희열과 고통을 안다. 읽어줄 이가 단 한 명만 있어도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 이야기는 들어줄 사람을 찾아 이동하며 자신의 운명을 살아간다. 그것은 구술자나 기록자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직 펄떡펄떡 살아 있었을 그 이야기를, 제 고통과 제 희열, 제 생애에 다름 아닌 그것을 봉인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가. 어떤 이야기는 살아남고 어떤 이야기는 사라지지만 어떤 이야기도 살해당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형태와 수준을 어렴풋하게 보았던 것 같다. 이야기는 살해됨으로써 가장 강력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는 ‘HIV/AIDS 낙인 지표 조사’의 조사원 교육에 강의를 요청받았다. 조사원 모두 감염인이라고 했다. 강의 일주일 전 담당자를 찾아가 에이즈에 대한 나의 무지와 공포를 고백한 후 책을 한 권 받아 돌아왔다.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감염인인 윤가브리엘이 쓴 <하늘을 듣는다>였다. 책 속에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과 짧았던 사랑, 홀로 감당했던 긴 투병의 고통과 서럽게 죽어가는 감염인의 현실에 대한 분노, 거대한 권력에 맞서 ‘약 먹을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비참과 절박함, 함께 싸워준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고마움이 마치 혈관 속까지 비칠 듯이 창백하고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떤 이는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천치를 읽고 가도’ 그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이 차갑고 맑은 이야기에는 그의 피눈물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나처럼 무지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세상 도처에 널린 폭력을 그려내고 있었다. 나는 천치가 되고 죄인이 된 기분으로 오들오들 떨며 교육장에 섰다.

그곳에서 만난 또 다른 ‘윤가브리엘들’은 예상과 달리 매우 유쾌하고 진지하며 열의에 넘쳤다. 게다가 내 무의식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주려는 듯 40, 50대 남성에 대한 내 소박한 기대를 연신 비껴갔다. 여성적인 말투나 부드러운 손짓뿐 아니라 비스킷 한 봉지를 까서 내미는 다감함도 그랬고, 야학에 놀러 가도 되느냐고 수줍게 물어보는 태도도 그랬다. 한 ‘아저씨’가 강의 잘 들었다며 네 잎 클로버가 코팅된 책갈피를 건넸을 즈음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와르르 무너뜨리며 다가온 새로운 세계였고, 그들은 이성애 중심의 성적 규범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나를 찾아온 어마어마한 방문객이었다.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3월부터 HIV/AIDS 낙인 지표 조사가 시작된다. 감염인 당사자가 직접 자신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세상에 전해올 것이다. 당사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가 그 정확하고 섬세한 언어 그대로 반드시 살아서 오기를 바란다. 이 사회가 그들 삶에 대한 난폭한 난도질을 그만두어서 그들이 결코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숨기느라 자신의 귀한 생을 다 써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그 이야기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할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며 기다리겠다.

홍은전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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