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02 19:28
수정 : 2016.03.02 21:49
우리는 촘촘한 감시 그물 속에 갇혀 있다. 벌써 몸의 일부인 인터넷, 휴대전화, 신용카드, 교통카드가 끊임없이 나를 기록한다. 곳곳에 널린 폐회로텔레비전(CCTV), 자동차 블랙박스는 또 어떤가. 몸과 마음의 흔적이 끈질기게 남아,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타자’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시대에 적응했고 어떤 것은 포기했다. 몇천만명의 정보가 유출되어 돌아다닌다니, 내 것도 피싱과 스팸에 쓰이고 있을 것이다. 카카오톡을 감청하느니 마느니 시끄러웠지만, 내 것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사태는 끝이 아니라, 바야흐로 감시사회로 돌진하는 중이다. 유토피아 분위기를 풍기던 정보사회와 달리 디스토피아를 암시하는 사회. 정보를 수집하는 것, 그리고 그 정보가 내게 돌아와 내 행동을 바꾸는 순간부터 감시라고 말한다. 무인 단속 카메라가 있는 줄 알면 누구나 속도를 줄이지 않는가. 내가 만든 정보(속도)는 역전되어 내게 개입한다.
신생아의 의료 이용과 예방접종 정보를 종합해 아동학대 의심자를 ‘색출’했다는 뉴스도 당혹스럽다. 감시사회가 이렇게 가깝다는 뜻이 아닌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도 병원을 찾고 예방접종을 받는 사회가 되었다. 감탄할 만한 정보체계는 절반의 사실일 뿐, 감시를 통해 가족에 개입하고 행동을 바꾸는 것이 또 다른 본질이다.
이제 노골적인 감시를 목표로 하는 ‘테러방지법’이 더해진다. 개인정보인 비밀번호나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동학대를 의심받는다는 것과도 차원이 다르다. 감시 대상이나 정보수집 권한, 통제장치도 중요하지만, 감시가 체계와 제도로 진화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신상과 행동을 넘어 말과 생각마저 들여다보겠다니 ‘획기적’이라 해야 어울린다.
물론, 우리는 새로운 ‘체제’에 재빨리 적응할 것이다. 테러 비슷한 말과 글은 (농담으로도) 쓰지 않고, 카페나 술집에서는 으레 주위를 살피는 것. 문자나 모바일 메신저의 말은 저절로 ‘검열’하게 되는 것. 무엇이 테러 행위인지, 왜 의심하는지 막연하게 정해 놓았으니 이럴 수밖에 없다. 통제장치도 허술하다니 각자 조심하고 ‘품행’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생존의 지혜다.
감시사회는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권력이 재단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데서 나아가, 종국에는 내 생각을 다시 만들고 새롭게 행동해야 한다. 어떤 이는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단순하게 세계인권선언과 이 나라 헌법이 정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양심, 사상, 표현의 자유, 그리고 자아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떻게 살아남을까, 생각하면 이번에도 무력하다. 되풀이되는 개인정보 유출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거기서 출발했으니 무관하지도 않은 감각이다. 알레르기 용어를 빌리면 ‘탈감작’이 되었다고 할까. 처음에는 약한 이물질에도 민감하지만, 노출이 잦아지면 점점 더 둔감해지는 법이다. 개인정보 유출에서 비롯되어 이제는 감시사회에도 둔해진 것은 아닌지. 우선, 피로감을 이기고 더 예민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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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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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회를 말하는 철학자(질 들뢰즈)와 감시사회를 분석하는 사회과학자(데이비드 라이언)가 내린 처방도 있지만, 내게는 너무 멀다.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넓고 깊은 토대 위에 구축되는 ‘강한’ 민주주의다. 아무 데나 갖다 붙일 안이한 만병통치약일 리 없지만, 감시(사회)를 민주적으로 감시하는 것을 빼고는 좀처럼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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