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07 19:54
수정 : 2016.03.07 20:11
“지난 2000년 우리 세 후보 중 유일하게 샌더스 상원의원 당신이 금융규제 완화 법안을 찬성했습니다. 그로 인해 감독당국이 파생금융상품을 규제할 수 없었고 결국 금융위기가 일어났습니다.” 올해 초 민주당 대선주자 토론 때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한 발언이다. 성난 미국인들의 성원에 힘입어 추격해오던 버니 샌더스로부터 ‘월가의 금융자본에 맞서는 서민의 대변자’라는 이미지를 빼앗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샌더스가 탈규제법안에 찬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법안에 서명을 해서 법으로 만든 것은 당시 대통령이자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이었다.
이 작은 사건에서 힐러리의 가식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 노선에 큰 변화가 일어난 방증으로 보는 것이 더 생산적인 해석이다. 레이건 집권 이후 민주당에서는 이념대결보다는 전문가의 문제해결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견해가 우세했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익을 시장친화적 정책을 통해 옹호하겠다는 ‘좌파’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던 게다. 클린턴 정부 때는 금융규제 완화, 자유무역 확대, 공적연금 축소 정책이, 오바마 정부 1기에서는 재정적자 축소 정책이 추진됐다. 그러나 오바마는 집권 2기에 유럽발 금융위기와 불평등의 확대 속에서 노선을 전환한다.
지난해부터 힐러리는 시장친화적 정책이 기술진보나 세계화와 같은 구조적 변화와 결합해 극심한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이것이 경제성장을 둔화시켰다는 주장을 수용했다. 또한 강력한 노조가 경제성장을 방해하기는커녕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도 받아들였다. 신자유주의와의 이러한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자유주의에 신고(古)자유주의(new paleoliberalism)라는 기이한 이름을 붙이는 언론인들도 있다.
힐러리의 자유주의가 남편의 신자유주의와 차별화되는 대표적인 지점은 정부의 역량에 대한 믿음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강조이다. 그의 신‘고’자유주의는 이해관계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함으로써 경제적 공동선을 달성할 정부의 역량을 신뢰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공공투자를 주도해야 할 정부의 역할에 주목한다. 힐러리의 자유주의는 또한 민주당이 정책정당이라는 미명 아래 지나치게 전문가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지지계층의 광범위한 참여에 기반한 풀뿌리 정당을 새롭게 복원하려는 시도와도 맥락을 같이한다. 과거 도외시했던 최저임금이나 노조의 교섭력 등이 의제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개혁의 강도나 진정성과 같은 매력에서는 샌더스에 비해 아쉬운 점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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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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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노선의 폐기는 성난 민심에 떠밀린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그들이 대변코자 하는 계층의 기대와 열망을 반영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총선을 앞두고 양극화와 저성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불어성장론’이나 ‘공정성장론’ 등이 등장했다. 이들은 강자와 내부자를 중심으로 짜인, 가치생산 및 분배에 관한, 기존의 경기규칙을 쇄신함으로써 성장과 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참여정부에 비해서는 정부를 강조하고, 지난 대선 때 야당에 비해서는 시장의 역할을 더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시장과 정부의 배합 정도도 중요하지만, 시장과 정부의 질을 개선하는 것은 더 시급한 과제다. 미국과 달리 건강한 개인주의나 공공부문의 소명의식이 취약한 우리의 경우에는 특히 정부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처들이 병행될 때에야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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