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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3.15 20:48 수정 : 2016.03.15 21:50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인공지능이 대체해야 할 직업으로 판사를 꼽는 의견들이 있다. 국민이 가장 불신하는 집단이 검찰, 국회, 법원 순이고,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이 재판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이런 의견들이 나오는 생각의 뿌리를 보여준다. 또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2013년 보고서에 의하면, 2030년까지 판사라는 직업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어 사라질 가능성이 40%라고 하니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지능형 법률자문회사가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판결 과정은 ‘사실’을 집어넣어 ‘법률’을 적용하면 ‘결론’이 튀어나오는 자동판매기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잘못된 판결을 가리켜 ‘기계적 판결’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 의한 법률 판단과, 판사들이 행하는 판결의 핵심적 특징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첫째는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재판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어야 한다. 경청(傾聽)은 그저 듣고 판단하는 분별이 아니다. 눈과 귀 등 자신을 개방하여 몸과 마음을 기울여(傾) 듣고, 공감하는 것이다. 그 사건에 놓인 당사자의 처지와 곤경을 이해하지 않는 판결은 법의 권위에만 기대는 기계적 판결에 불과하다. 경청은 삶의 구체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이고, 판결은 그 구체성을 담아낸 결론이어야 한다.

둘째는 회의하는 감각이다. “신의 눈을 갖지 못한 재판부로서는 감히 이 사건의 진실에 도달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는 한 판결에서의 고백처럼, 판결이 무오류일 수 없다는 회의하는 감각이야말로, 그 판결의 과정을 정당하게 하는 힘이다. 나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고뇌 속에서 신중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고려가 자리잡는다. 판사는 오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결론을 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직업이다.

또한 판사는 법이 반드시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회의할 줄 아는 감각의 소유자여야 한다. 판결이 무오류의 논리일 수 없듯이, 법도 그 자체로 부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여야만 기계적 판결을 막을 수 있다. 삶의 구체성은 언제나 법보다 우선한다. 법과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삶의 구체성을 돌아보는 성실한 고뇌가 필요하다. ‘법’의 언어로 정의를 드러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법과 정의 사이의 간극’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언어의 제한성에 기인한다. 법을 통해 정의를 발견하고, 법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발견하려는 부단한 ‘해석의 노력’은, 판사라는 직업이 감당해야 할 ‘시시포스의 형벌’이다. 판결은 법과 삶을 서로 되비추며, 법과 삶 사이에 대화의 길을 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상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일반적인 여신상은 안대로 두 눈을 모두 가리고 있지만, 두 눈을 모두 뜨고 있는 모습도 있다. 또 한쪽 눈만을 가린 모습이 풍자되기도 한다. 판사라는 직업은, 자신에게 주어진 칼의 권위를 가능케 하는 저울 자체를 회의할 줄 아는 감각의 소유자여야 한다. 삶의 구체성을 들여다보면서도 공정한 판단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눈감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판사라는 직업과 관련해서는 한쪽 눈만을 가린 여신상이 상징적이다.

판사는 인간이기에 오류를 범하지만, 인간이기에 공감할 수도 회의할 수도 있다.
정정훈 변호사
이러한 능력이야말로 인공지능에 의한 판단과 인간의 판결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판결은 공감하고 회의하는 인간의 영역이고, 인간의 영역이어야만 한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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