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08 19:11
수정 : 2016.05.08 19:11
영국은 1973년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1963년과 1967년 두 차례 가입 실패에 이은 세 번째 시도에서였다. 앞서 두 번의 실패는 만약 영국을 유럽연합에 가입시키면 ‘미국의 스파이’인 영국이 유럽 문제에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유럽인에 의한 유럽 건설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는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비토 때문이었다. 드골은 1969년 지방행정개혁에 관한 국민투표가 부결되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인 1970년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비로소 영국의 유럽연합 가입이 가능해졌다.
영국의 유럽 통합에 대한 회의적 태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영국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출범하던 1950년대에 대영제국의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로 유럽연합의 일개 회원국가가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따라서 통합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 보수당은 불문헌법에 근거한 의회주권의 전통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싫어했고 노동당은 유럽연합의 정체성이 기본적으로 대륙 자본가들의 카르텔이라고 믿었다. 영국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유럽경제공동체로 확대 개편하던 1955년 메시나 회의에도 초대받았지만 가지 않았다.
대신 유럽자유무역기구를 결성하여 유럽 통합과 별개의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결국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단일한 유럽이 필요하다는 미국의 의지에 따라 유럽자유무역기구를 포기하고 유럽연합 가입을 택했다. 즉 영국의 유럽 통합 참여는 미-소 대결과 냉전이 고착화되던 세계질서의 재편을 반영하고 있고 그 안에서 미국과 긴밀한 동맹을 통해 대서양주의의 한 축을 유지하고, 동시에 프랑스와 독일이 추구하는 유럽주의 흐름에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양 세력 사이의 균형자로서 영국의 이익과 역할을 극대화하려는 고려가 있었다.
영국은 1975년에 이미 유럽연합 탈퇴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에는 67퍼센트의 지지율로 잔류가 결정됐다. 그러나 올해 6월23일로 예정된 두 번째 국민투표를 앞두고는 찬반 비율이 팽팽하게 나타나면서 긴장이 감돌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4월 영국 방문에서 영국이 유럽연합 탈퇴 후 미국과 무역협정을 다시 맺으려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고, 프랑스와 독일은 영국의 예외적인 요구들을 들어주면서 잔류를 설득하고 있다. 런던의 기업가들도 탈퇴를 반대하고 보수당의 다수, 노동당과 자유당의 대다수 의원들도 잔류를 희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퇴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은 것은 유럽연합의 역할을 둘러싸고 효율과 집중을 지지하는 통합의 흐름보다 자율과 분권을 지지하는 해체의 흐름이 더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럽연합은 시민의 참여보다는 회원국가 사이의 거래 비용을 줄이는 체제의 효율성이 장점이었지만 최근에는 이민과 난민 문제로 유럽시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복지와 안전 두 가지 차원에서 그 역할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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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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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갖는 불만에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외정책을 왜곡하는 극우 정치인들이 개입하고 여야 정치인들이 국내정치 문제의 책임을 편리하게 유럽연합에 전가하면서 가장 복잡한 문제를 가장 단순하게 해결하려는 국민투표가 제시되었다. 점진적 타협과 협상을 특징으로 하는 영국의 전통과 비교할 때 탈퇴를 놓고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국민투표는 영국의 전형적인 정치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움직임은 미국의 트럼프 현상이나 한국의 4·13 총선처럼 시민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아래로부터 세계 정치의 변화를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중요한 시험 사례가 되고 있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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