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하철 스크린도어(안전문) 선진국이다. ‘철도왕국’ 일본도 스크린도어 설치율만큼은 한국보다 한참 아래다. 스크린도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도입됐다. 최근 많이 설치된 밀폐형 스크린도어는 선로 추락 사고를 거의 완벽히 예방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하청구조 및 비정규 노동과 결합하자, ‘누군가 죽어야 유지되는 안전장치’라는 끔찍한 아이러니가 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사람 목숨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천민자본주의는 막스 베버가 만든 말로 낙후하고 천박한 자본주의를 뜻한다. 베버는 당시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유대인 금융업자들에게 인종적 경멸에 가까운 반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래서 이들을 ‘천민’(pariah)이라 불렀고 천민자본주의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그 반대편에 베버가 규범적 개념으로 설정한 것은 ‘합리적 자본주의’였다. ‘합리적 자본주의’가 있었다면 열아홉 살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고는 자본주의가 ‘미개하고 낙후해서’ 벌어진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합리적이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 매뉴얼이나 기준도 없이 노동자에게 위험한 일을 시켰다면 그것은 천민자본주의라 부를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 노예와 평민들은 그렇게 일을 하다 죽어갔다. 하지만 이번 사고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대한민국은 근로기준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나라다. 안전 매뉴얼은 갖춰져 있었다. 매뉴얼대로 2인1조로 작업하고 보고하면서 상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면 사고는 일어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고 벌써 비슷한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킬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일이 터지면 기업은 “규정을 지키지 않은 당사자의 과실”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덮어씌웠기 때문이다. 규정을 지키려 하는 노동자도 아마 있었을 게다. 다만 우리가 그 사람을 확인할 수는 없다. ‘요령있게 일을 못한다’며 순식간에 잘려나갔을 테니까. 명확히 해두자. 구의역 사고는 매뉴얼이나 제도가 미비해서 벌어지는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가 아니다. 이 시스템은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작동되도록, 즉 가장 힘없는 노동자만 희생되도록 ‘세팅’되어 있다.
한국 노동자는 네 시간에 한 명씩 죽는다. 오랫동안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재사망률에서 압도적 1위였다. ‘안전 불감증’ 따위 단어로 이 비참을 설명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선진국 문턱에 진입한 사회가 산재사망률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웹툰 <송곳>의 대사로만 설명 가능하다.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위험의 외부화(외주화)’는 자본의 본성이다. 한국 사회는 그 본성을 실현할 최적의 환경이었고 국가-자본은 자신들의 생존과 이해에 가장 ‘합리적인’ 선택들을 거듭하며 이 체제를 완성시켰다. 반면에 이윤보다 인간을 우선하는 것은 자본의 논리 내부에선 불가능한 선택지다. 심지어 시장의 규칙을 강제하는 것조차 자본주의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착취와 억압의 구조가 양산해온 죽음들에 대해 내 일처럼 공감하는 움직임이 퍼지는 것은 희망적이다. 그러나 단지 개개인의 공감과 추모에 그치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윤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공적 가치들, 이를테면 건강, 안전, 교육이라는 영역에서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얼마나 부담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그 논의의 판을 짜는 것, 정치와 사회운동의 역할은 여기에 있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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