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06 19:12
수정 : 2016.06.06 19:12
우리 동네에는 농사일을 아주 잘하는 농부가 있다. 몸으로 하는 일도 잘하지만 농기계를 다루는 일은 인근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그의 솜씨는 모내기철인 요즈음에 더욱 빛난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소 사료용으로 논에 재배한 풀을 거둬내야 한다. 그 작업에는 길이 2미터가 넘는 칼날을 붙인 커다란 트랙터가 동원되는데, 그가 이 일을 시작하면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의 솜씨를 구경한다.
그는 논에 들어서면 칼날을 옆으로 뉜 다음 기계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 온 동네가 울릴 정도로 굉음을 내며 전속력으로 논바닥을 휘젓는다. 네모가 반듯하지 않은 산골 논이지만 찌꺼기가 남아 뒤돌아가는 일 없이, 풀 밑동까지 깔끔하게 베어낸 후 순식간에 다른 논으로 이동한다. 모내기를 빨리 시작하고 싶은 농부들에게 그의 행선지는 항상 초미의 관심사이고 그 기계의 왕림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남들 일을 마친 후 그는 남들보다 훨씬 많은 농사를 늦게 시작하지만 남들보다 늦지 않게 모내기를 끝낸다. 좁은 다랑이 논에서도 그는 커다란 트랙터를 요령 있게 부려 기계가 잘 닿지 않는 귀퉁이도 손으로 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농사가 갈수록 기업화되는 세상에서 그는 모든 농사꾼의 선망의 대상이다.
나는 동네에서 그와 반대되는 구경거리다. 그는 10여분 만에 끝낸 일인데, 나는 예초기로 10시간 동안 풀을 베고 그것을 갈퀴로 긁어모아 경운기로 옮겨 다른 논에 밑거름으로 깐다. 풀이 물기를 먹고 볕을 받아 썩어야 논을 갈 수 있으니 며칠을 기다려야 다음 일을 계속할 수 있다. 그래서 모내기가 거의 끝나가는 들판에 내 논만 아직 갈색으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말은 않지만 못내 안쓰러워하는 눈치다.
몇 달 전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퇴직을 앞둔 사람이 찾아왔다. 귀농해서 축산 일을 모색하던 차에 내가 양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온 것이다. 그는 닭을 치는 요령이나 달걀의 판로, 수익성 등에 관해 많은 얘기를 듣고 돌아갔다. 그를 보낸 뒤 뭔가 아쉬움이 남기에 전화를 했다. 이제 인생의 2막을 시작하려는 판인데 그 나이에 인생의 제3막이 펼쳐지기는 쉽지 않을 터인즉 수익성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기준으로 일을 선택했으면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힘든 일도 오래 버틸 수 있고, 결과에 관계없이 후회가 남지 않을 것이며,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가족을 설득하기도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한 달 전쯤에는 시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 둘이 선생님 손에 이끌려 일손을 돕겠다고 왔기에 감자밭에서 김매기를 시켰다. 땡볕에서 쪼그려 앉아 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녀석들은 두 주가 지난 주말에 다시 찾아와 일을 하고는 나중에 감자 캘 때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일이 즐거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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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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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결과와 목표, 또는 대가에 얽매이지 않는 노동은 겪어보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즐거움을 준다. 몸은 뜻하지 않은 기쁨의 원천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일들은 성과와 효율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예속된 노동으로서 노동이 본원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몸으로 하는 노동은 오늘날 기피와 경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농사일만큼은 예외다. 농사일이 즐거운 것은 그것이 내가 주관하는 일이고, 자연 속에서 생명을 보살피는 일이며, 그 생명들이 날마다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농사일은 일의 결과에 대한 평가와 관계없이 과정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다.
김계수 농부·순천광장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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