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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서울 광화문역 지하보도에는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농성장이 있다. 지난 5월 그곳을 지키며 서명을 받던 날이 있었다. 착오가 생겨 8시에 와야 할 교대자가 10시에 오게 되었다고, 농성단 집행위원 ㅎ이 전화로 전했다. 한껏 미안한 목소리로 그녀는 나에게 ‘2시간 더 있어줄 수 있느냐’ 물었고, 나는 약속이 있어 그럴 수 없다고 대답했다. ㅎ은 대타를 구해보겠다며 그때까지만 있어 달라 부탁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훔쳐갈 것도 없어 보이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농성장이 4년 동안 이렇게 빈틈없이 채워져 왔다는 사실에 적이 감동했다. 월요일 저녁 8시 반, 나는 인적이 뜸해진 광화문역 지하보도에 앉아 하릴없이 다음에 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도 나처럼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죽은 자들이었다. 영정이 걸린 농성장들이 있다. 그 농성들은 그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농성이 시작되자 죽은 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어느새 열둘. 그중 6명은 이곳에 앉아 서명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돌연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 그들이 하나둘씩 저쪽 죽은 자의 자리로 건너갔다. 삶과 죽음의 거리 고작 3미터. 그들은 불에 타 죽었고 호흡기가 떨어져 죽었고 맹장이 터져 죽었다. 맞아서 죽었고 분노해서 죽었고 절망해서 죽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복지는 치사할 만큼 높은 곳에 있거나 턱없이 앙상했다. 장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이 복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소, 돼지에게 하듯 장애인의 몸에 1~6급의 등급을 매겨 각종 서비스를 제한하고, 생계 지원이 절실한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부양의무자를 규정하고 그 책임을 떠넘긴다. 의도적인 사각지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던져 모욕과 절망을 증언한다. 지난 수십년간 교수와 관료, 장애계 활동가들 모두가 그것이 문제라고 입을 모아 말해왔지만 아무도 그 문제를 붙들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의 복지를’ 요구하며 무모하게 싸움에 나선 사람들은 바로 중증장애인들이었다. 4년 전의 일이다. 9시쯤 다음 사람이 왔다. 그는 야학 학생이었다. 집에서 쉬다가 전화를 받은 그는 “그까짓 거 양말만 신으면 되지 뭐”라고 말했고, ‘고맙다’는 말을 하려 했을 땐 이미 전화가 끊어진 후였다고 ㅎ이 전했다. 후에 ‘농성할 때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물었을 때 ㅎ은 “농성장이 펑크 날 때”라고 대답했으나, 실제로 농성장은 그녀의 노력으로 2012년 8월21일 이후 단 한시도 펑크 난 적이 없다. 그녀의 말처럼 이 긴긴 싸움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그 하루하루를 채우고 버텨주었으므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는 우리 사회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되었다. 모두가 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아무도 싸우려 들지 않았을 때 이들이 낸 용기란 결국 이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 광화문까지 오는 데 15년이 걸렸다. 우리는 2001년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중증장애인들이 맨몸으로 막아섰던 그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왔고, 2007년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한강대교를 네발로 기어 쟁취해낸 활동보조 서비스를 이용해 여기까지 왔으며, 2009년 ‘탈시설 권리’를 요구하며 시설과 세상 사이의 아득한 낭떠러지에 놓았던 그 징검다리를 딛고 여기까지 왔다. 무지개를 만나려면 비를 견뎌야 한다. 나는 그것을 저항하는 중증장애인들 속에서 천천히 몸으로 배웠다. 이번 비는 참으로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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