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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07 18:38 수정 : 2016.09.07 19:40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첫째 사례. 8월24일 <한겨레>의 김남일 기자가 쓴 글에서 따왔다. “입만 열면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능력, 자기 당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억지… 미국에서는 그에 대한 정신감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트럼프가 아홉 가지 기준에 따른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의심된다며….”

막말과 기행을 일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니 혹시 ‘비정상’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미국정신의학회가 윤리적 이유를 들어 개인에 대한 정신감정을 반대했다지만, 또 누가 알겠는가, 경쟁이 심해지면 어디선가 감정을 하겠다고 나서고, 상대방은 그러자고 덜컥 받아들일지.

과연 정신감정을 할 것인지, 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따위는 먼 나라 구경꾼의 호기심이라 치자. 내가 가진 관심은 ‘정상성’의 위기를 만난 미국 대통령 선거의 곤혹스러움과 사회의 대응 방식이다. 트럼프가 비정상이라고? 그럼 그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클린턴 지지자에 버금가는 다수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혼란스럽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의 정치는 비정상을 판별하는 데 실패(또는 포기)했고, 그 책임을 의학으로 미루고자 한다. 정치적 정상성이 의학적 정상성으로 전화하는(그리고 환원되는), 말하자면 정치의 ‘의료화’.

둘째 사례. 새누리당이 며칠 전 대구에서 사드 전자파의 유해성 토론회를 열었다. “사드 레이더 전자파는 군이 설정한 안전 펜스 밖에선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는 주장, 그리고 “100%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만큼 건강상 유해하지 않다고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데는 반대한다”는 토론이 오갔다고 한다. 건강이 주인 노릇을 한 보기 드문 토론회였다.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비현실성. 주민들이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이유는 암이 생길까 걱정돼서가 아니다. 한국 땅 어디에도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는 것이 압도적 주장이지만, 새누리당 토론회는 다른 답을 했다. 안보와 평화체제의 본질을 묻는 말에 건강 유해성을 호출한 것이다. 모른 것이 아니라 의도한 것이리라. 건강과 질병이라는 이해관계는 정치공동체 전체에서 눈을 돌려 나와 우리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강력하다. 그렇다면 벌어진 일을 건강 문제가 된 사드 배치 또는 사드의 ‘의료화’라 불러야겠다.

비슷한 말을 붙일 데가 여럿이다. 일본 후쿠시마에서 온 수산물, 밀양의 고압 송전탑, 태안 앞바다의 기름유출 사고. 장시간 야간 근무와 비정규 노동, 그리고 가난도 포함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은 특히 잊을 수 없다. 이 모든 곳에서 건강과 질병이 기준이 되는, 농후한 의료화의 기운을 읽는다. 고혈압이나 중풍, 암, 우울증으로 진단받기 전에는 위험과 고통은 자격 미달이다.

의료화가 꼭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처럼 때로 교묘한 아픔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은 것일 터. 하지만 순기능은 일부일 뿐, 유동하는 위험과 고통을 은폐하는 것이 더 큰 역할이다. 질병이 생기는 데에 ‘역치’가 있다면, 의료화는 그 이전의 삶 또는 그 이하의 고통을 지워버린다. 폭발하기 전까지의 그 많고 오랜 상처와 고단함은 있었지만 없는 것,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트럼프의 정신감정 결과는, 사드 전자파가 건강에 유해한 것은,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유족에게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가장 나중 결과다. 거기에 이르는 동안, 또 그 이전에 켜켜이 쌓이는 생명과 삶의 파괴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병이 나면 그때는 늦다는 말은 본디 이 뜻이리라. 그러니 드러나기 전의 삶을 의료에 미루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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