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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시아는 지역 전체를 대표하는 인권재판소가 없는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유럽이 1959년부터, 미주가 1979년부터, 아프리카가 2004년부터 지역을 포괄하는 인권재판소를 설립해 운영해온 것과 비교하면 아시아의 늦은 발전 상황을 알 수 있다. 세계 인구의 60%, 약 44억명의 사람들이 아시아에 거주하는 가운데 지리적 광범위함과 문화적 다양성이 이유로 제시되기도 하고, 많은 국가가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집권하고 있는 현실이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부재는 더 근본적으로 아시아의 지역통합 수준과 연관이 있다. 유럽의 경우 1949년 출범한 유럽평의회가 주관하여 유럽인권협약을 채택했고 이에 근거해 재판소가 설립되는 과정을 밟았듯이 아시아도 유사한 과정을 밟아 재판소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지역통합 수준은 중국과 일본의 패권 경쟁 속에 미국에 의한 외부적 균형이 유지되는 가운데 역내 국가들이 상호간 위계질서 없이 각자 자율성을 갖는 무정부 상태를 선호하면서 구속력을 갖는 공동기구 설립을 위한 양보와 상황변경을 선택하지 않고 있다. 아시아에서 인권재판소 설립은 세 가지 가능한 경로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는 지리적으로 인접하거나 문화적으로 유사한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의 소지역 국가들이 지역별 인권보장기구를 만들어 운영하면서 확대해가는 것이다. 둘째는 기존의 지역협의체인 동아시아정상회의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아세안지역안보포럼 등에 기반한 인권보장기구를 구상하는 것이다. 셋째는 아시아태평양국가인권기구포럼이나 아시아헌법재판소연합과 같이 아시아에 존재하는 인권기구 협의체를 바탕으로 인권재판소 설립을 시도하는 것이다. 아시아 인권재판소의 중요성은 세계의 보편적 규범을 지역화하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지구화하는 과정에서 이를 매개하는 공론장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국제인권규범의 기초가 되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권리들을 제시하면서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의도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문화에 대한 논란이 문화상대주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간신히 확보한 보편주의의 토대를 상실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결국 세계인권선언의 규범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전통을 갖는 각 지역의 인권재판소를 통해 언제든지 해석과 논쟁을 거쳐 실천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과 함께 1966년 두 개의 국제인권규약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이제까지 인권 논의의 주체가 국가였다면 이후부터는 개인들이 주체가 되어 국가와 국제사회를 상대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는 데 있다. 이렇게 확보된 개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도 지역의 인권재판소는 중요하다. 국가의 정책을 상대로 개인들이 자신의 권리가 침해된 부분에 대해 아래로부터 도전한다면 각 지역의 인권재판소는 국가를 넘어서는 위로부터의 비교와 검증을 통해 보편적 가치와 원칙을 찾아 나갈 수 있다. 북핵 위기와 남중국해 사태를 둘러싸고 동아시아 정세는 급속히 국가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어떤 경우라도 고립된 국가 중심의 사유에서 벗어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민주적 개인성을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고, 문화적 자결권이라는 이름 아래 비인간적인 지역의 관습을 정당화하거나, 보편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다른 지역의 삶의 방식을 무시하는 태도는 견제되어야 한다. 국가들의 아시아를 넘어선, 시민들의 아시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인권재판소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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