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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투표에 가려져 그리스 국가부채 위기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요즘도 그리스 국민들은 유럽연합의 회원국가로 남은 채 천문학적 규모의 빚을 갚느라 고생하고 있다.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약속한 2015년부터 2018년 사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3.5%의 재정흑자를 달성하기 위해 부가가치세를 13%에서 23%로 인상했고, 반부패계획 및 공공행정 개혁을 실행 중이며, 67살로 정년을 연장하여 조기은퇴를 막는 연금개혁 속에 국민들은 3분의 1씩 연금이 깎이는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그리스는 1944년부터 49년까지 좌파·우파 사이의 내전을 거쳤고 1967년부터 74년까지 군사정권 시기를 거쳤지만 이후 민간 우파 세력의 집권과 1981년 전후 첫 좌파 정부 등장, 1989년 우파 정당과 공산당의 연립정부 구성 등을 통해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를 이룩했다. ‘그리스 패러독스’는 이처럼 민주화의 성공적인 완수와 민주적 제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정치체제의 비효율과 후견주의가 계속되어 국가 부도 위기를 지속적으로 겪는 그리스 현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모순이 생겨난 과정에는 적어도 두 가지 계기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민주화 과정에서 좌파·우파의 타협과 소극적 과거청산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 민족주의 문화를 서구화를 통해 개혁하고자 했던 1981년 유럽연합 가입이다. 그리스의 유럽연합 가입을 주도했던 우파는 그리스가 과거의 고립적인 문화로 후퇴하지 않기 위해 유럽과의 교류를 중요한 기회로 생각했고 1974년 집권 이후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왕정을 폐지하며 군부의 이익을 존중해 주는 타협을 추진했다. 반면 좌파는 한때 유럽연합이 작은 나라의 주권을 위협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에 위치한 그리스 농업을 망치며 독자적인 국가계획 수립을 불가능하게 하여 그리스 산업을 황폐화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1981년 집권 이후 반유럽연합, 반나토, 미군기지 철수 등의 정책을 이데올로기와 실용정책은 다르다는 설명과 함께 폐기했다. 이처럼 온건화를 채택한 정치 엘리트들 사이의 정책 수렴은 그리스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안정화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이익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타협은 기득권 세력의 온존과 부패의 지속으로 이어져 근본적인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스의 좌우파 정당은 서민을 보호하는 가부장적 국가주의와 개인적 연고를 중시하는 정당 후견주의라는 특유의 문화를 자신들의 지지 기반 확장을 위해 적극 활용함으로써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지 정책 집행의 투명성이 떨어지고 세금 회피와 온정주의적 부패가 일상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스의 위기는 단순히 그리스 국가부채 위기일 뿐 아니라 유럽의 금융체계 위기와 유로존 내의 불평등 성장에 따른 경쟁력 위기가 혼합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위기의 근원에는 지지자에게 줄 반대급부를 위해 유럽연합 회원국이 갖는 높은 신용을 이용해 대외부채를 손쉽게 늘려간 그리스 정부의 선택이 자리잡고 있다. 즉 ‘그리스 패러독스’는 유럽의 거대 자본에 항복한 가부장적 국가주의 전통의 실패를 의미하지만 국제 투기자본의 위협에 시달리는 약자의 저항 이미지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 사례는 국내정치에서 무원칙한 타협의 위험과 국제정치에서 무분별한 휩쓸림을 경고하고 있고, 사회경제적 평등이라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최대 정의가 정착되지 않으면 공정한 절차를 강조하는 최소 정의의 민주주의도 그 존재 기반이 무너지면서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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