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1.09 18:25 수정 : 2016.11.09 20:02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의료, 관광, 금융, 소프트웨어 등 유망 서비스 분야부터 개방과 경쟁을 통해서 혁신해 나가고… 의료 자법인 설립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게 된다면 원격의료와 같이 좀더 논란이 큰 과제를 추진하는 데도 모멘텀이 생길 수 있다.”

2014년 8월12일 열린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이다. 이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서 주문을 외듯 비슷한 말을 했다. 인터넷 매체인 <라포르시안>이 헤아려 봤더니, 어떤 때는 한달에도 서너번씩 원격의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원격의료에 대한 믿음이 있나 생각한 것도 비슷한 이야기를 끈질기게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짐작이 틀렸다. 확신은커녕, 이제 모든 말을 ‘청부’ 발언으로 해석해야 할 판이다. 원격의료를 새로운 돈벌이라 여긴 재벌이나 대기업이 대통령을 ‘매수’한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돈을 내는 대신 대놓고 세무조사 무마를 요구한 대기업도 있다니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닐 것이다. 재벌은 돈을 내고 대통령은 그 대가로 청탁을 해결해주는 나라라니.

한 민간인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고 기밀 자료를 봤다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인사에 개입해 사람을 심었다는 것도 충격이 크지 않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시스템이 망가진 증거이긴 하지만, 대다수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간접적이라고 할까. 봉건 왕조를 떠올리도록 민주주의가 후퇴했으나, 실로 큰 문제는 형식과 절차를 어지럽힌 수준 너머에 있다.

사익의 도구로 악용했다는 것이 국정 ‘농단’의 본질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공공선을 추구하는 것이 국정의 도덕이라면, 모두의 이익에 공정하고 정의롭게 봉사하는 것이 존재 이유가 아닌가. 그들은 국정의 공공성을 배신했다. 알고 보니 몇몇 정치 엘리트와 그 주변이 대기업과 짬짜미를 해 공적 자원을 제 주머니로 챙겨 넣었다고 한다. 민주공화국의 헌정을 파괴하고 국정을 농단한 것이 아니면 이 참담한 사태를 무엇이라 부를까.

경제 엘리트는 피해자가 아니라 이 사익 연합의 파트너다. 삼성이 최순실씨의 딸에게 몇십억, 몇백억을 지원했다는 것은 습관성 줄대기라 치자. 구조적 ‘동맹’(정경 ‘유착’이란 말로 모자란다)은 미르재단과 케이(K)스포츠재단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민낯을 드러냈다. 대기업과 재벌이 돈을 내는 것과 대통령의 찬조 발언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지 않는가. 그때마다 대통령은 기업이 목을 매는 노동 4법과 경제활성화법의 통과를 촉구하면서 빚을 갚았던 셈이다. 서민이 낸 혈세와 노동자의 피땀이 바탕이 된 돈, 그중에는 백혈병이 앗아간 목숨 값도 들어 있다. 비도덕적 엘리트 동맹은 이 돈으로 민중과 노동자를 옥죄는 법을 거래했다.

농단의 실체가 이렇다면, 국정을 정상으로 돌리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은 형식과 절차를 정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권력구조를 바꾼다고, 또는 책임총리와 책임장관제를 택한다고 완결될 일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 엘리트가 결합하여 이익을 주고받는, 이 끈끈한 사익 연합을 해체해야 한다.

어떻게? 먼저 국정 문란의 실상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죄를 물어야 한다. 이제 시작한 것이니, 꼼꼼하고 끈질겨야 실상이 밝혀진다. 나아가 힘이 약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에게 더 큰 권력이 필요하다. 실질적 민주주의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라 불러도 좋다.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사회 권력이 더 큰 목소리를 내야 또다른 국정 농단을 막을 수 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