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내일 2016년 12월9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투표가 있다. 역사는 이날을 어떻게 기록할까. 제도 정치에 탄핵을 압박한 촛불 민심이 승리하는 날? 아니면 대통령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국회의원들이 95퍼센트의 민의를 배신한 날? 다만 한 가지, 나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민주공화국의 마지막 생명줄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탄핵안은 통과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박근혜 게이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들리는 소식마다 국기 문란에다 헌법 위반이 아니었던가. 뇌물죄가 성립하니 어쩌니 하는 것은 한가한 소리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황당한 불법에 절망했고, 정치적으로는 몇 번이라도 탄핵이 끝났다. 모든 이가 “이것도 나라인가”라고 탄식하는 마당에, 그런데도 탄핵이 부결되면 대의 민주주의는 없다! 탄핵은 만신창이 꼴인 한국 민주주의의 결과인 동시에 현재이기도 하다. 이 순간까지 탄핵안 통과를 확신할 수 없는 제도 정치, 이 현실이야말로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증거다. 주권자의 뜻과 무관하게 마피아식 의리나 제 잇속만 따지는 ‘대의제’란 도대체 무엇인가. 민주주의라 부르기에는 완전한 실패가 아닌가. 탄핵은 또한 민주적 원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정책 왜곡을 심판하는 절차다. 시민의 삶을 배신하는 정책은 무능하고 무력한 민주주의의 틈을 뚫고 자라난 것, 폭로된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실상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건강보험료 부과체계 개편. 행정부와 국회가 나서고 언론과 시민이 힘을 보태 논의를 시작하려 할 즈음, 청와대가 나서서 논의를 중단시켰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민주적 절차는 단숨에 중단되고 다음은 새 정권이 들어서기를 기약해야 할 형편이다. 시민의 일상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건만, ‘주권재민’은 고사하고 형식적 토론도 사라졌다. 둘째, 영리 의료정책으로 널리 알려진 의료관광, 줄기세포, 원격의료 등. ‘의료 게이트’라 불릴 정도면 그동안의 음습하고 민망한 속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적 관계를 통해 불법으로 진료하고 그 보상으로 특혜를 받았다는 것은 난맥의 한 가닥일 뿐이다. 의료인과 일반 시민, 언론과 사회단체가 한목소리로 영리 의료를 반대했건만, 몇몇의 사사로운 이익과 부정한 거래가 갖가지 정책결정의 뿌리라니. 봉건 왕조라도 눈치를 봤을 법한 민주의 배신이다. 절차와 과정이 이럴 때 이른바 실질 민주주의야 오죽할까. 재단을 만드느니 어쩌니 하면서 대기업과 야합하여 이익을 주고받는 틈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노동자, 농민, 청년들은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뜻과 의견을 대신할 정치 세력은커녕 노동개혁이니 성과급이니 온갖 공세는 아직 박정희 체제에 머물러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는 힘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부재’의 현실에서 역설적으로 풍부한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유는 다시 움튼 희망 때문이다. 탄핵 성공은 절차적 민주주의, 그것도 최소한을 회복하는 첫걸음일 터. 비전과 과제로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면, 더불어 확인한 잠재력만 해도 (실패하더라도) 탄핵에서 머뭇거리거나 자족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시민권력’이 키운 힘을 바탕 삼아 더 많고 더 깊은 민주주의로 가는 거대한 정치·사회적 실험을 시작할 수 있다. 불길이 요원으로 번지는 데 필요한 불쏘시개는, 곳곳에서 촛불의 바다를 이룬 시민과 민심이다. [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