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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국문과 교수 탄핵 정국 이후 주권자들의 정치 지도자에 대한 인식, 감정, 판단은 어떻게 변화될까? 길라임과 사이다가 유행어가 되는 대중정치 국면에서 ‘입신출세주의’라는 오래된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입신출세주의의 대략적 함의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만으로도 이해가 가능하다. 이들은 신분 상승을 이룬 엘리트이고 이질적 계급 자원을 모순 없이 체현한다. 이런 상반된 계급적 표지가 대중정치의 중요한 ‘덕목’이 되곤 한다. 입신출세형 캐릭터가 지도자가 되면 사람들은 그들을 왠지 모르게 나와 가까운 ‘계급’으로 감지한다. 이런 왠지 모를 친밀감이 지도자와 대중 사이에 기이한 밀착 관계를 만들고 보수와 진보는 각자의 이념에 따라 이런 친밀한 감각을 대중정치의 동력으로 삼는다. 신분과 계급과 젠더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이들이 등장하는 정치 드라마에 펼쳐지는 이유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보수와 진보가 각자 달리 공유하는 고유한 입신출세형 지도자이다. 박근혜는 입신출세형 지도자의 여성판본이고, 기득권 대 반기득권 진영이라는 수사를 동원한 이재명 시장의 전략은 입신출세주의를 토대로 한 전형적인 대중정치 패턴을 보여준다. 입신출세형 지도자를 선호하고 지지하는 집단의 특성은 계급이나 젠더 분석으로 온전하게 환원되지 않는다. 입신출세형 캐릭터는 너무 흔하고 진부할 정도로 ‘한국적인’ 인물형이다. 김수현은 남성 입신출세담과 피해자 여성의 복수극을 주로 다뤘고, 이 서사는 1990년대까지 대중 드라마의 주류가 되었다. ‘길라임’의 작가 김은숙은 남성 입신출세담을 여성판본으로 전유해서 진부하고 새로운 드라마로 흥행 신화를 만들고 있다. 김수현에게 없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가 도입되고, 신분상승을 위해 교섭하고 협상하는 주체는 이제 여성 주인공이 된다. 남성은 여성의 신분상승 ‘도구’가 된다. 진부하지만 새롭고, 상투적인데도 끌리는 서사와 캐릭터의 바닥에는 입신출세주의의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이 이런 진부한 새로움에 끌리는 것을 아둔한 대중성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식인의 자기만족에만 도움이 된다. 남성의 전유물인 입신출세의 판타지를 여성이 전유하는 데까지 백여년이 걸렸다. 이 과정은 협상과 투쟁, 반복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낸 긴 역사였다. 이재명의 인기 상승은 정치 드라마에서 입신출세 캐릭터라는 반복을 통해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협상 전략과도 관련된다. 입신출세 캐릭터의 자질은 평소에 거의 변별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대선과 같이 1%의 차별성이 결정적으로 작용할 때, 혹은 사상과 정책 기조, 정당 색깔 등에 차별성이 없이 ‘인물’이 선택 기조가 될 때 그 마지막 1%를 움직이는 부분이 바로 이런 ‘캐릭터’이다. 입신출세 캐릭터는 가득 찬 잔을 넘치게 하는 한 방울의 효과이고 한국 사회의 기저에 항상 존재하고 작동하는 저 깊은 곳의 ‘원형질’이다. 인물 중심의 정치판, 정책과 사상의 부재는 입신출세 캐릭터를 매번 대중 드라마의 한복판으로 불러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엘리트 비평가들은 대중이 무지몽매하고 황당한 이야기에 빠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근대성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백년 동안 한탄해왔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는 좌파 이론도 대중이 왜 춘향전 ‘따위’를 좋아하는지 결국 설명하지 못했다. 입신출세담은 어쩌면 알파고 시대의 춘향전 같은 것이다. 낡은 드라마가 판치는 시대라고 한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새로운 정치 드라마를 만들려면 ‘대중’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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