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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25 18:26 수정 : 2017.01.25 21:01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지난해 11월 말 한 트럭 운전사가 사망했다. 육군부대가 지뢰를 제거했다는 지역에서 흙을 옮기던 도중이었다. ‘지뢰제거작업 완료’ 지역에서 퍼낸 흙을 싣고 와 농지에 하적한 후 이동하던 중 트럭 앞바퀴가 대전차 지뢰를 눌렀다. 지뢰 폭발로 트럭 운전석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됐다. 운전사는 목숨을 잃었다.

예고된 사고였다. 사고 전날에도, 당일 오전에도 대전차 지뢰가 발견됐다. 군은 신고를 받고 지뢰를 수거해 갔다. 그것뿐이었다. 왜 지뢰가 또 나왔는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조사도 없고 후속 조처도 없었다. 해당 군청은 군에서 지뢰제거 작업을 완료했다고 했으니 손 놓고 있었다. 국방부도, 철원군도, 시공업체도 공사를 중단시키지 않았다. 위험은 고스란히 작업자의 몫이 됐다. 그날, 그곳에서 안전은 보장되지 않았다.

지뢰는 슬로모션 대량살상무기다. 세계적으로 평균 20분마다 한 발씩 폭발하며 인명을 살상한다. 2010년 한 해에만 거의 3천명이 지뢰 때문에 죽었다. 피해자의 대다수는 민간인이다. 대한민국의 ‘미확인 지뢰지대’에 매설된 지뢰만 100만발이 넘는다. 지뢰매설밀도 세계 1위다. 피해자도 1천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숫자도 중요하지만, 이 사건은 더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고 목숨을 지키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바로 그 시민의 안전과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 국가가 보유한 무기라면?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국가안보란 무엇인가? 안보는 안전보장의 줄인 말이지만, 명확한 정의도 없고 광범위한 합의가 있는 정의도 없다. 그 어원을 추적해볼 수는 있다. 마음의 평온한 상태를 의미하는 고대 로마어 세쿠리타스(securitas)가 그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의 평화라는 개념에 종속됐다. 이후 국제정치가 베스트팔렌조약을 계기로 주권국가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는 국가와 유착되어 안보는 통상 국가의 안보로 이해되어 왔다. 유럽에서 사용되던 ‘security’를 일본이 안전보장(安全保障)으로 번역한 것이 한국으로 유입되어 안전보장, 줄여서 안보로 통용되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국가안전보장이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국가안보를 위해서 그 주민의 안전이 위해를 입는다. 모순이다. 국가안보가 왜 필요하고,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를 잊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누구의 생명도 지킬 수 없다. 한 사람의 죽음 위에 눈물을 떨구지 않는다면 세상에 남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 위에 세운 ‘국가안보’라는 것은 1퍼센트를 위한 허구일 뿐이다. 진정한 안전보장은 한 사람의 불안을 촉촉한 눈매로 함께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그 근본을 잊을 때 국가는 ‘국가안보’라는 초월적 제단에 인간을 희생양으로 바친다. 국가의 무기로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도 우발적 사고일 뿐이다. 군대 내에서 군인이 사고로, ‘자살’로 죽어도 불행한 일일 뿐이다. 여군이 성폭행과 성추행에 시달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총알에 뚫리는 방탄복을 도입하기도 한다. 국가안보를 위해서!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무기체계, 가장 최근에는 사드라는 것을 들여오는 것도 국가안보를 위해서다. ‘세월호’는 매일, 대한민국 도처에서 침몰하고 있다.

이제는 뒤집힌 안보를 바로잡을 때다. 국가안보가 최고선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온한 상태, 세쿠리타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진정한 안전보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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