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31 18:13
수정 : 2017.01.31 18:52
박구용
전남대 교수·시민자유대학 이사장
오래전 울산의 한 해수욕장을 걷고 있었다. 초상을 그려주는 한 여성 화가가 눈에 들어왔다. 지나가던 대머리 아저씨가 그녀에게 그림 값을 묻는다. “3만원입니다!” 말이 떨어지는 순간 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수북이 그려 달라 주문한다. 취기가 있어 보였다. 화가는 머리카락 없이도 멋지다며(…) 잘 그려드리겠다고 달랜다. 6만원, 심지어 9만원까지 주겠다며 아저씨는 화가를 윽박지른다.
한심하기보단 안쓰러운 아저씨의 요구, 화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대머리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웃돈까지 들먹이며 행패를 부릴까 생각하면 그림 같은 머리카락을 선물할 법하다. 하지만 이 여린 화가는 욕설을 들어가면서도 끝내 주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거짓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보이는 대로 그린다.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아야 화가다. 화가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그려낸다. 이렇게 화가의 전율하는 몸을 타고 탄생한 작품은 위로와 화해를 이끌기도 하지만 불안과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은닉된 진리를 폭로하는 예술에는 분노의 화살이 빗발친다. 이자들, 기꺼이 화살받이가 되려는 자들이 바로 예술가다.
이구영 작가의 <더러운 잠>을 향해 수천수만의 화살이 일시에 날아들었다. “풍자를 가장한 인격모독이고 질 낮은 성희롱이다.”(중앙일보) “여성 알몸을 정치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전체 여성을 욕보이는 것이다.”(조선일보) ‘더러운 잠’에는 관음증을 앓고 있는 두 보수 언론이 훔쳐본 여성은 없다. 새누리당 여성의원협의회가 든 손팻말 문구엔 저들의 음흉함이 배어 있다. “더러운 잠에 표창원 네 마누라도 벗겨주마!” 표 의원의 부인과 박근혜를 같은 여자로 몰아가며 혐오를 증폭시키는 저들의 왜곡된 여성애가 참으로 음탕하다.
‘더러운 잠’은 예술인가, 외설인가? 기준에 따라 판단은 갈린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독립적 기준은 없다. 하지만 미학의 지평에서 누구나 쉽게 판단할 만한 기준이 있다. 홀로 그림 감상을 할 때 에로스가 몸에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면 외설이고, 그렇지 않으면 예술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더러운 잠’을 외설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변태일 가능성이 높다.
‘더러운 잠’은 복제된 그림이다. 하지만 그것이 복제한 원본은 없다. 원본 없는 복제가 새롭게 반복될 뿐이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08~10),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1814), 마네의 <올랭피아>(1863),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1800~3), 세잔의 <현대판 올랭피아>(1873~4), 피카소의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1907), 프로이트의 <베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1995)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이 다름, 곧 새로움을 딛고 그림 속 여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 시대의 편견을 탄핵한다. 가장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정치적인 것이 예술이다.
‘더러운 잠’은 아쉽게도 노출증 환자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 의제를 드러낸다. 미학적 담론은 제쳐두고 비평을 주고받을 만큼 은유와 상징이 숨겨져 있지 않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그 때문에 정신병적 위기에 빠진 한국인에게 유사 상황을 경험토록 하는 예방접종의 기능도 약화된다. 프로파간다로 전락한 위험만 증폭된다. 이 지점에서 반대편 감각을 가진 이들의 상처와 분노가 솟구친다. ‘더러운 잠’이 2004년 ‘환생경제’를 미러링하는 혐오의 정치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복제의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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