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19 17:30
수정 : 2017.02.19 18:46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흔히 미국은 자연, 유럽은 문명으로 비교된다. 자연은 한 눈에 알아보기 쉽지만 익숙해지면 곧 감동이 시들해지는 반면 문명은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깊이를 알아갈수록 더 빠져든다. 유럽을 떠나온 사람들이 건설한 미국은 유럽의 문명에 주눅 드는 경향이 있고 유럽은 미국의 자연과 풍요로움을 부러워한다. 유럽은 자신들이 20세기에 이미 성취했던 국민건강보험제도가 2010년 미국에서 오마바케어라는 이름으로 어렵사리 통과되자 미국이 마침내 20세기에 들어섰다고 비꼬았고, 미국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 아래서 챙긴 복지로 자랑을 일삼는 유럽을 ‘군사적 피그미’라고 조롱한다.
미국과 유럽의 차이는 유럽이 규칙과 협력을 존중하는 다자주의적 칸트의 세계를 추구하는 반면 미국은 힘에 근거한 일방주의적 홉스의 세계를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유럽연합(EU)이 주장하는 ‘규범권력’이란 바람직한 정책을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자 이 정책의 확산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을 일컫는다. 이에 대해 미국은 19세기 유럽이 강했을 때 유럽 역시 힘을 위주로 한 국제정치를 주도했었고 이제 힘이 약해지자 규범권력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약자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숲속에서 곰이 소동을 피울 때 미국처럼 총을 든 사냥꾼과 유럽처럼 겨우 칼을 들고 있는 사냥꾼은 대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은 2차 대전 전후로 나치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연대했었고 공산권이 붕괴되자 미국이 유럽의 안정을 전제로 아시아로 눈을 돌리면서 분열의 단초가 싹텄다. 그러나 곧 테러리즘이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했고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났을 때 르몽드는 “우리 모두가 미국인이다”라며 연대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라크 전쟁이 끝난 후 미국과 함께 전선에 남아 있던 이는 대서양 동맹의 한 축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뿐이었다. 결국 테러의 근원적 배경인 중동 갈등은 유럽의 친 팔레스타인 정책과 미국의 친 유대 정책이 부딪히며 두 진영을 분열시키는 문제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트럼프 정부 등장 이후 미국과 유럽의 분열은 더욱 표면화되고 있다. 유럽연합(EU) 주재 미국대사로 내정된 시어도어 맬럭은 EU가 초국가적이고 선출되지 않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미국의 신고립주의가 백인과 기독교에 근거한 미국적 기원의 확인을 통해 국가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대변하는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보면, EU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면서 동시에 실체가 불분명한 초국가적인 모습으로 주제넘게 강대국 행세를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러시아와 관계 강화를 통해 중국의 팽창주의와 EU의 규범권력을 견제하면서 세계질서를 단순화하려는 의도를 내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EU는 지난 해 유럽시민의 이익을 강조하고 적극적인 군사안보 활동을 주장하며 국제법에 근거한 다자주의 접근을 옹호하는 내용의 ‘2016 EU 글로벌 전략’을 발표했다. EU와 트럼프 정부는 자유주의적 개방 대 보호주의적 패권, 초국가적 네트워크 대 국민국가적 배타주의로 대립하고 있다. 물론 현실의 국제정치에서는 여전히 “미국 없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고 미국 또한 어떤 국제문제도 홀로 해결할 수 없다.” EU가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규범권력을 목표로 미국과 구별되는 초국가적 실험을 지속하는 한 서구의 쇠퇴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해체라는 거대담론은 아직 때 이른 주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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