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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7 18:22 수정 : 2017.02.27 19:07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전기밥통 속에서 밥이 익어가는 그 평화롭고 비린 향기에 나는 한평생 목이 메었다. 이 비애가 가족들을 한 울타리 안으로 불러 모으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아 밥을 벌게 한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식구들을 위한 밥벌이는 지루하지만 평생을 도리 없이 버텨야 한다.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긍지’ 있던 우리의 삶이 이제 기계와 로봇의 출몰로 위협받고 있다. 로봇의 시대에 노동의 가치는 훼손될 수밖에 없나? 밥벌이와 노동의 존엄이 위협받는 시대에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노동의 가치는 시장에서 결정되며 결국 임금으로 표현된다. 기계와 로봇의 확대는 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듦으로써 임금을 낮추고 노동의 가치도 떨어뜨린다. 한편, 노동의 착취와 소외에 분노했던 마르크스는 노동의 가치란 자본가가 노동자를 효과적으로 부리기 위해 부담해야 할 비용이라고 보았다. 이때 노동의 가치는 노동의 수요·공급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는 ‘순수한’ 희소성만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관리비용도 아니다. 노동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노동의 가치에는 밥벌이의 신성한 책무 이행을 돕기 위해 어느 수준으로까지 최소한의 밥그릇을 보장해줘야 할지에 관한 사회 구성원들의 판단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 수준은 기업이 기계와 로봇으로 얻게 된 부의 총량, 그리고 기업과 사회의 교섭력에도 좌우된다.

노동의 가치 하락 자체는 용인하되, 사회안전망 강화나 법인세 인상 등 노동시장 바깥에서 2차 분배에 힘쓰는 게 합리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로봇이 노동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간의 유용성을 의심케 하는 상황에서의 정공법은 법정 노동시간 단축이다. 이는 노동의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높임으로써 노동의 가치 하락을 막아줄뿐더러,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의 유연성을 둘러싼 노사 협상을 촉진한다. 이들 조처는 나아가 밥벌이의 지루한 일상을 뛰어넘어 삶의 진정한 목적을 당당하게 추구할 기회도 제공한다. 바로 여가이다. 여가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적극적 활동이다. 가족을 돌보고, 친구와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지역 문제를 풀기 위해 시민과 의견을 나누는, 이 모든 활동이 여가이자 ‘좋은 삶’의 요소이다. 각자의 여가가 촘촘한 신뢰의 끈으로 연결될 때 일의 가치도 커지고 ‘지역의 부’도 늘어난다.

아직은 노동시간을 크게 줄일 때가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유사한 역사를 보더라도 경제적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정치와 사회에 있고, 우리의 선입견에 있다. ‘더 많은 여가’를 향한 제도 변화와 사회혁신을 추동하기에는 자본과 기득권층의 힘은 강하고,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취약하다. 고된 노동을 잠과 티브이와 스마트폰으로 달래는 습관, 그리고 인간은 타고나길 게으른 존재라는 ‘미신’도 변화에의 동참을 주저하게 만든다. ‘좋은 삶의 유토피아’는 지금 당장 시간을 내 소소한 즐거움을 직접 느껴보고 여가를 선용하는 법을 익히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주변의 도서관, 주민센터, 공방 등에서. 그것도 어렵다면 동네 헬스장에서라도. 단, 누군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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