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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5 18:09 수정 : 2017.03.15 21:05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머리손질을 받으며 <한겨레21>을 읽고 있는데 미용사가 감탄하는 투로 말을 건넸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걸 읽으세요?” 나는 당황해서 표지를 보여주었다. “이건 그냥 잡지인데요?” 하지만 미용사는 웃으면서 “저는 그런 건 어려워서 못 읽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사실은 쉽고 재밌는 잡지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그녀가 관심을 가질 만한 기사를 찾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문득 그녀가 예전에 이 잡지를 읽어보려 했다가 정말 어려워서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의도치 않게 잘난 척한 셈이 된 나는 잡지를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그리고 속으로 자문하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겨레21> 수준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업을 끝내고 직업활동에 뛰어드는 걸까?

아마 그 미용사는 고등학교를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교과과정이 실습 위주였거나,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어려워져서 따라가지 못하고 앉아만 있다가 졸업해야 했을 것이다. 학교는 이런 학생들의 존재에 무관심하다. ‘어차피 대학에 못 가는 아이들’이니까. 학교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학생들의 성취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간 이하의 성적을 받는 집단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상위 10%, 심지어 1%의 성취(어느 학교가 몇 명을 서울대에 보냈고 몇 명을 ‘인서울’ 대학에 보냈는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우리나라 교육에 ‘성취도’라는 개념이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 프랑스에서는 해마다 바칼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가 끝나면 언론에서 얼마나 많은 학생이 이 시험을 통과했는지 보도한다. 합격자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만큼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능이 끝나면 물수능이었는지 불수능이었는지만 따진다. 수능 평균점수가 올라가는 것은 학생들의 성취도가 높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한국의 교육담론에서는 변별력이 성취도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교육에 대한 논의는 배움 자체의 가치를 부정한 채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학교는 일종의 사다리로 간주되며, 시험은 학생들을 줄 세우는 도구로만 여겨진다. 문제는 진보적인 교사들도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주려면 ‘학교 공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고 믿는다.(학교 공부가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은 왜 월급을 받으며 그 자리에 있는 것인가?) 그들은 아이들이 학교를 싫어하는 이유를 오해하고 있다. 아이들은 사실 공부를 좋아한다. 심지어 시험도 좋아한다! 아이들을 좌절시키는 것은 그들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어른들의 태도이다. 어떤 시험이든 시험에서 70점을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정도 점수를 받으려면 수업시간에 정신 차리고 들어야 하고 집에 와서 복습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70점은 0점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수로는 ‘어차피 아무 데도 못 가기’ 때문이다. 70점이나 0점이나 똑같다면 뭐하러 70점을 받으려고 노력하겠는가? 1학기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배움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모든 사람이 <한겨레21> 정도의 글을 이해할 수 있는 나라와 소수의 사람만 그럴 수 있는 나라에서 정치의 형태는 꽤 다를 것이다. 전자가 더 민주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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