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19 19:19
수정 : 2017.03.19 19:37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 유럽연합은 로마조약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분주하다. 유럽 통합을 주도했던 초기 6개 회원국은 1957년 3월25일 로마조약을 맺고 본격적인 경제통합의 시동을 걸었다. 로마조약에 초대받았지만 참여하지 않았던 영국은 6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도 함께하지 않는다. 브렉시트 이후 유럽연합은 올해 발표한 <유럽의 미래에 대한 백서>에서 5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 발전을 추구하는 길, 둘째, 유럽연합의 기능을 단일시장만으로 축소하는 길, 셋째, 국가별로 통합에 차이를 두는 다중속도와 다층체제를 인정하는 길, 넷째, 의제 수를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길, 다섯째, 모든 영역에서 통합의 폭과 속도를 높이는 길 등이다.
이 가운데 정책 사안별로 채택 여부와 시행 시기를 달리할 수 있는 세번째의 다중속도, 다층체제 접근법이 유럽연합의 유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동유럽 국가들은 이 길을 따를 경우 동유럽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줄어들거나 동유럽 국가들이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한다. 즉 다중속도, 다층체제는 결국 통합이 아닌 분열을 조장할 수 있으며 로마조약의 교훈은 더 강력한 통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백서가 유럽연합의 대내적 발전을 다루고 있다면 대외 정책은 지난해 발표한 <유럽연합의 글로벌 전략>에 담겨 있다. 2003년에 발표했던 <유럽연합의 안보전략>과 비교하면 현재의 전략 보고서는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2003년에 언급하지 않았던 유럽시민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글로벌 전략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둘째, 군사안보적 차원에서 남중국해를 포함한 세계 각 지역에 독자적 방위능력을 갖춘 강력한 개입 의지를 천명하고 그 방법은 국제법에 근거한 다자주의적 접근을 추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전략은 모두 딜레마를 안고 있다. 첫째, 유럽시민의 직접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기능이 강화될수록 유럽연합이 갖는 규범적 성격은 약화될 확률이 높다. 유럽연합의 규범적 성격은 유럽의 이상적인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엘리트 사이의 합의의 문화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시민의 요구에 직접 책임지지 않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 때문에 가능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독자적인 방위 능력을 갖춘 군사안보의 주요 행위자로서 세계 각 지역에 개입하려는 시도도 불가능한 목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대내외의 적을 설정하고 군사적 목표를 정하는 과정은 훨씬 높은 수준의 합의와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현재 수준의 통합으로는 회원국 사이의 의견 차이가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누구라도 전쟁을 시작하기는 쉽지만 끝내는 것은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최근 밝힌, ‘대북정책에서 전략적 인내 시기가 끝났고 선제타격도 고려한다’는 강경 입장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는 점을 뜻한다. 트럼프 등장 이후 세계적인 신고립주의 흐름 속에서 유럽연합은 거의 유일하게 국제법에 근거한 다자주의적 접근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다. 유럽연합마저 유럽시민의 이익을 강조하면서 유럽과 비유럽 사이의 벽을 높이고 군비확장의 길을 간다면 인류사의 새로운 정치체제 실험의 의미는 퇴색하고 단지 거대하고 배타적인 국민국가의 확대 재생산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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