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29 18:38
수정 : 2017.03.29 20:58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시민건강증진연구소 소장
약속이 난무하는 때, 누가 이 말을 했는지 짐작해 보시라. “일자리 창출, 4차 산업혁명 대응, 저출산 극복, 양극화 완화, 4대 핵심분야를 중심으로 전략적·선제적 투자 확대.” 어느 대통령 후보의 약속인지 알기 어렵다고? 미안하지만 아예 틀렸다. 대통령 후보가 아니라, 이틀 전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2018년 예산편성 지침이다.
행정부가, 그것도 정권 교체 이전에 선수를 친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의로 해석하자. 첫번째 가능성은 의견 일치다. 어느 정당과 정파 할 것 없이, 진보와 보수도 상관없이, 다음 정부도(!)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이면 적어도 사회통합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국가예산을 투자할 ‘핵심분야’를 다투지 않으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소야대든 아니든, 걱정할 필요가 없다.
유감스럽게도 이 ‘합의’ 시나리오는 비현실적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보고 느끼는 들끓는 갈등과 분출하는 열망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닫는다. 한쪽에서는 비정규 노동을 크게 줄여야 한다고 걱정하는데, 다른 편에서는 더 쉽게 해고할 수 있는 ‘노동개혁’을 밀어붙인다. 치료비 때문에 가계가 파탄 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도 하고, 재정이 어려우니 개인이 더 많이 책임져야 한다고도 한다. 말만 비슷하지 각론은 딴판이다.
정부 방침인지, 어느 대통령 후보의 공약인지 헛갈리는 이유는 딴 데 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분들이 내놓는 약속은 한결같이 밋밋하고 안전하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 같다. 늘 현실성과 실현 가능성을 공격받으니 이해는 된다. 다루어야 할 문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터, 지금 정부가 고른 일자리, 4차 산업혁명, 저출산, 양극화와 어찌 겹치지 않겠는가?
당사자들은 억울할지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개혁 방안을 내놨는데, 알려지지도 않고 반응도 없다고 하소연할 법하다. 이미 몇 후보가 약속한 공공 일자리, 기본소득, 아동수당 같은 공약은 그럴 수 있다. 예산이 많이 들고 정책도 크게 바꾸어야 하는, 대통령 선거가 다루어야 할 ‘단절적’ 변화임이 틀림없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라. 본선을 시작하면 공약다운 공약으로 전화하리라 믿는다.
나는 정책 공약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국가-시장-사회가 움직일 방향을 알아차리고 여러 주체가 행동하고 판단하는 데는 공약 이상이 필요하다. ‘교체’를 원하고 주장하려면 더 크게 달라야 한다. 삶과 노동의 곳곳에 스며들어 개인과 개별 정책에 지침이 되고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것, 바로 국정 비전이다.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 미국 트럼프 정부라면 ‘미국 우선 외교 정책’이나 ‘일자리 되찾기와 성장’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내가 지금 후보들에게 바라는 국정 비전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저성장 시대의 국민 ‘번영’, 안심과 안정을 위한 사회안전망 완비, 삶의 질을 보장하는 노동. 하나같이 백가쟁명식 토론을 해야 하는 가치이자 지향임을 모르지 않지만, 이렇게 되묻는다. 논란과 논쟁을 왜 두려워하는가?
대통령 선거는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지 함께 찾고 합의하는 둘도 없는 기회다. 구체제는 끝이 보이지만 미래는 명료하지 않은, 이번 대선은 더 그렇다. 담대한 국정 비전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라. 시민을 초대하고 토론을 촉발하며 함께 귀 기울여 들으라. 그래야 이 어려운 대선이 의미가 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