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16 19:18
수정 : 2017.04.16 19:22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7세기 영국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헨리 워튼은 “대사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려고 해외에 파견된 정직한 신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에 대해 우리 외교부의 한 차관보는 외교관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지만 경우에 따라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할 때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간단한 설명에는 ‘거짓말’과 유사하지만 의미가 약간 다른 ‘정보의 조작’과 ‘정보의 은폐’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 시카고대의 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는 <왜 리더는 거짓말을 하는가?>라는 책에서 거짓말과 조작, 은폐를 구분하여 설명한다. 거짓말이란 자신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그것을 사실로 믿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하는 발언이다. 정보의 조작은 어떤 목적을 위해 특정 사실을 강조하거나 축소하는 것을 말한다. 은폐란 어느 입장을 뒤집거나 약화시킬 수 있는 정보를 숨기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모두 속임수의 일종이다.
예컨대,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할 때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당시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와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이라크가 국제 평화에 위협이 되는 대량살상무기(WMD)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두 이유를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사실을 당시 정책결정자들은 전쟁 전에 이미 알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보의 조작과 은폐가 시도됐고 때로는 명백한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대개 정치인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공리주의적 이유를 제시한다. 거짓말을 통해 공익을 늘리면 유능하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그러나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공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는 전통적인 이해에서도 벗어나 있다. 단순한 통계나 분명한 사실도 왜곡하는 트럼프의 일상적인 거짓말은 대체로 세 가지 목적을 가진다. 첫째,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의 시민을 속이고자 하는 의도다. 둘째,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의 결속을 다지고 충성심을 확인하려는 장치다. 셋째, 자신의 거짓말을 통제하지 못하는 반대세력의 좌절감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물론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의 거짓말을 기성질서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한다. 예컨대, 트럼프의 사소한 거짓말과 비교하면 클린턴의 자유와 진보, 여성인권의 담론은 도달 불가능한 목표이자 상투적이고 거대한 거짓말이다. 트럼프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언어로 나에게 직접 말하는 사람이지만 클린턴은 추상적이고 고상한 거짓말로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고 있는 악녀다. 거짓말이 게임의 중요한 요소가 되자 모든 것이 불분명해지면서 소통의 난잡함이 커지고 정치에 대한 희화화와 시민들의 혐오도 증가한다.
명백한 가짜정보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회는 부정적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우선,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가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쓰면서 사회적 거래비용이 증가한다. 또한, 신뢰할 만한 정보와 투명성이 결여된 상황은 시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방해하여 정치에서 책임을 묻기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말은 시민들 사이의 상식적인 소통경로를 파괴함으로써 진실의 추구를 핵심으로 하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해친다. 현실정치에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포의 조장이나 전략적 은폐가 항상 존재한다. 진실만을 추구하는 도덕성이 역사의 진보를 보장하지 않지만 도덕성 없는 유능함 역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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