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25 18:27
수정 : 2017.04.25 21:00
박구용
전남대 교수·시민자유대학 이사장
폭력과 공포는 한 몸이다. 앞뒤가 없다. 공포를 먹고 자란 폭력이 공포를 키운다. 독재자는 공포를 사랑한다. 폭력을 합리화할 수단이니까. 히틀러는 유대인을 악마로 조작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죽이는 자(동지)를 사랑하고 죽여진 자(적)를 증오한 괴물 히틀러는 폭력정치의 대부다. 인류의 적은 악마가 아니라 전쟁과 파괴를 즐기는 평범한 폭민이다. 이들을 자극하는 것이 폭력정치, 협박정치다.
나치를 대변한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분할 과정으로 규정한다. 첨예한 대립을 통해 동지들을 결속하는 세몰이가 정치다. 그에게 정치는 적과의 전쟁이다. 그는 적에 대한 두려움을 적개심으로 바꾸면 동지애가 뜨거워진다고 가르친다. 이런 논리로 나치는 시민의 자유를 유린하는 안보·질서 프레임을 앞세워 편가르기 정치를 했다.
나치가 그랬듯 이 땅의 독재자들도 끝없이 비상상황을 연출했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과 남북 긴장, 그리고 전쟁 논리는 저들의 공유재산이자 식자재 창고였다. 적개심으로 배를 불려온 것이다. 저들이 적과의 동침에 집착하고 도착하는 진짜 이유다. 그런데 촛불과 탄핵으로 적대적 공존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한쪽이 사라졌으니 다른 쪽의 몰락을 예견할 수 있다. 남한이 적과 동지의 이분법에서 멀어질수록 김정은 정권의 수명은 짧아질 것이다. 김정은의 폭력정치에 기생할 마음이 없다면 적의 적개심을 흐트러뜨려야 한다. “적이여, 적은 없다네!” 철학자 니체의 말을 북한 정권을 향해 흘릴 때다.
장미대선이 한창이다. 수구적 적대 논리가 무너지고 우정과 평화를 향한 기대와 열망이 넘쳐나길 바랐다. 순진한 기대였다. 안보 장사치들이 판을 뒤집으려고 난리법석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하시겠습니까?” “북한이 주적입니까?” “대북결재 받으시겠습니까?”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다. 상대편에 으름장을 놓으며 자기편을 동원하려는 책략이다. 이런 간계로 장미대선은 ‘죽음을 사랑하는 폭력정치’와 ‘생명을 사랑하는 평화정치’의 대결로 재편된다.
폭력정치는 양극단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위협한다.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협박에서 빠져나오긴 쉽지 않다. 그래도 생명을 사랑하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압박에 짓눌려선 안 된다. 우선 양극단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을 이겨내야 한다. 하나의 극단을 선택하는 대신 두 극단 사이에서 함께 사유하고 토론하는 평화정치를 보여야 한다.
국가보안법 존폐는 극단으로 의견이 갈린다. 악법의 폐지를 원하는 쪽일수록 대화로 합의점을 찾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철학은 이를 용기라 한다. 북한이 주적인지 물으면 되물어야 한다. “제2의 적, 제3의 적이 누구냐?” “일본과 중국도 적인가?”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지상파 방송에선 대답 못할 것이다. 이것이 주적을 말해선 안 되는 이유라고 설명해야 한다. 세계시민은 그것이 지혜임을 안다. 대북결재 운운하면 그 전형이 대북송금과 정상회담이 아니라 ‘총풍’임을 일갈해야 한다. 이는 전략이다.
‘나’들이 모여 우리를 만들고, 우리가 모여 나라를 만든다. 우리가 만든 나라와 저들이 만든 나라는 적이자 동지다. 우리와 저들 사이엔 긴장이 흐른다. 이 긴장을 폭력이 아니라 자유를 키우는 힘으로 만들려면 통일된 세계시민의 나라로 가야 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진 저들과도 우정을 키워야 한다. 물론 우정이 인간 공동체(koinonia)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잊지 않은 말이 있다. “친구여, 친구는 없다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