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7.06 17:47 수정 : 2017.07.06 20:55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던 ‘위안부’ 동영상 자료가 발굴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시기 위안부 관련 연구와 기념사업은 왜곡되고 중단되기를 반복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나, 화해치유재단 대책이 중요한 정치적 의제일 수밖에 없다. 지난 정부의 왜곡된 정책을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역사 연구와 기념 작업을 근본에서 새롭게 고안하고 발명할 패러다임의 전환이 더욱 필요하다.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절실하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역사 공방전이 뜨겁지만, 막상 한국에서 역사는 사람들의 일상과 삶 속에 자리 잡지 못했다.

인터넷의 과열된 역사 공방을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반론도 있을 것이다. ‘위안부’ 관련한 문제적 저작이나, 소녀상 관련 논란에서도 드러났지만,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기억과 기념(commemoration)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도 기반도 없는 상황에서 민족주의니 수동성이니, 피해자성 같은 몇 가지 조악한 단어들을 무기로 ‘위안부’ 문제는 공방전으로 소비되어 버렸다. 여기에 여성의 주장이 곧 페미니즘이라는 단순 논법이 첨가되어 위안부 담론과 페미니즘 논의는 말도 안 되는 수렁에 빠져버렸다.

소녀상과 관련된 논란 중에 가장 희극적인 것은 미국의 ‘용감한 소녀상’과 ‘위안부 소녀상’을 비교하면서, 앉은 자세의 수동성과 서 있는 자세의 능동성을 비교하는 논의였다. 게다가 이런 단순 논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면 비판을 할 수 없게 된다. 단순 논법의 문제를 지적하면 페미니즘을 공격한다는 공허한 반론을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위안부’ 담론에서 페미니즘은 이처럼 이론의 조악함이나 근거가 박약한 문제 제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물론 페미니즘 감별사처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페미니즘이 논쟁과 비판을 회피하는 도구가 되거나, 파시즘과 역사수정주의를 가리는 의장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정책도 대안도 없이 혐오발화 공격으로 일관하는 우파 야당의 전략은 여성 인물을 앞세우며 더욱 강화되고 있다. 페미니즘 정치가 여성성의 파시즘적 전유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위안부 담론에 대한 공방전이 뜨거웠지만, 여성 기념관 몇을 제외하곤 막상 한국에 페미니즘 관련 기념관도 아카이브도 역사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안부’ 관련 기념관도 몇 개에 불과하다. 기념관은 있는데 아무도 가지 않고 일반인은 존재조차 모르는 기념관도 수두룩하다. 민주화 이후 꽃피운 기념 작업과 논의가 강제로 중단되면서 기념 작업에 대한 이론적 전환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2000년대 멈춰버린 기념 작업을 다시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런 발상이 가야사 문명권과 지역 기념사업을 연계하는 낡고 소모적인 정책을 반복하게 만든다. 건물을 짓고 자료를 전시하는 기념사업은 가상현실이나 인터페이스 기반의 비물질적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는 게 국제적 추세이기도 하다.

이런 일을 시작할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는 사상 검증과 탁현민 검증으로 채워졌다. 검증 작업을 도맡아 한 심문관은 대부분 여성 의원이었다. 여성의 얼굴을 한 파시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페미니즘 정치는 사상 검증을 앞세운 정치 세력과 전략적으로도 연대해서는 안 된다. 전략적 연대조차도 아니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안티테제를 넘어선 페미니즘 정치 세력의 새로운 결집이 필요하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