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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03 18:16 수정 : 2017.08.03 20:49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8월1일치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가 ‘백인 역차별’을 이유로 들어 소수인종 우대정책을 운용하는 대학을 대상으로 조사와 소송을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트럼프를 지지한 집단의 욕망이 백인우월주의인가, ‘역차별에 대한 원한’인가? 이는 미국 사회의 파시즘화를 고민하는 논의에 반복해서 출현하는 질문이다.

광장 민주주의를 다수의 폭정으로 전도하면서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자유한국당의 혁신선언은 트럼프의 후예답다. 그러나 좀 더 어려운 문제는 이런 식의 역차별 논의가 트럼프의 미국만이 아니라 최근 한국에서도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이주노동자 차별 금지와 최저임금 문제, 여성 고용 할당, 블라인드 채용까지 기존의 차별을 철폐하려는 모든 시도에 역차별 논란이 따라붙는다. 최근 인터넷에는 역차별 사례를 모으고 역차별에 대항한다는 집단적인 움직임도 크게 퍼지고 있다. 촛불혁명 이후 한국 사회에서도 파시즘의 대두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위태롭게 불타오르는 패권 전쟁은 상실과 회복의 정념으로 충만하다. 역사적으로 파시즘 정치는 외부를 향한 전쟁과 내부를 향한 적대를 강화했고, 인종주의는 학살을 정체성 정치로 정당화했다. 파시즘의 증오 정치는 원한, 박탈감, 상실감을 체제화하고 정당화하면서 학살을 ‘권리 회복’과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전도시켰다. 파시즘이 외부의 적을 초토화하는 세계대전과 내부의 소수자를 절멸하는 홀로코스트를 동반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파시스트 정치 지도자는 국민을 적대시하고 국민에게 전쟁을 선포한다는 특성을 공통으로 드러낸다. 정치 지도자의 통치 행위는 이제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별하여, 배제하는 국민에 대한 적대적 행위로 전도된다. 파시즘 정치는 이를 혁신이라고 부른다.

파시즘은 혁명을 증오하고, ‘혁명 때문에 빼앗긴 것’을 되찾아오는 투쟁을 혁신이라고 칭했다. 파시즘은 약자에 대한 차별과 절멸의 기획을 빼앗긴 자의 ‘자기 회복’을 위한 투쟁으로 전도한다. 이렇게 자신을 빼앗긴 자의 자리로 반복해서 정립하고 정당화하면서 파시즘의 정체성 정치는 상실감을 존재론의 깊은 심연에 각인시킨다. 상실감이 존재론의 근간이 되면 현실의 다수와 소수를 둘러싼 힘과 권력관계는 전도되어 버린다. 상실감이 현실의 권력관계를 대체한다.

여기서 현실의 권력관계와 불평등에 대한 어떠한 논리적인 토론과 설득도 불가능해진다. 빼앗긴 자라는 믿음이 현실의 권력관계를 대체해버린다. 이렇게 파시즘은 빼앗긴 자의 자리를 적대와 절멸의 정치를 정당화하려는 방법으로 전유해버린다. 트럼프와 그를 모델로 삼는 후예들의 파시즘 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좀 더 쉬운 일이다. 더 어려운 것은 빼앗긴 자들의 자리가 파시즘 정치로 전유되는 지점이다.

파시즘의 증오 정치는 특정 대상을 ‘혐오’하는 혐오 일반과 다르다. 증오 정치는 실제 차별을 받는 소수 집단과 벌이는 ‘역차별’ 전쟁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증오 정치의 산물인 혐오 발화와 차별 선동 역시 대상 집단에 대한 혐오 일반과 다르다. 파시즘의 ‘논리’는 이렇다. 차별에 반대하는 것도 차별이다. 즉 특정 집단이 차별받는다는 이유로 보호받는 건 차별이고 ‘보호받지 못하는’ 나는 권리를 침해받는다. 그러니까 차별 철폐에 반대하는 건 내 몫을 지키는 투쟁이다. 파시즘의 세계에는 오로지 ‘몫’을 둘러싼 나와 적들 사이의 투쟁뿐이다. 해방의 정치는 ‘내 몫’을 둘러싼 적대적 투쟁을 넘어서야 한다는 인식은 파시즘이 남겨준 뼈아픈 교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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