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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06 20:55 수정 : 2017.08.06 20:59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아마도 김광균의 시에서 애처로운 이미지의 폴란드를 처음 만났을 것이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로 시작하는 ‘추일서정’에서 폴란드는 비운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려 애쓰는 가여운 나라였다. 그리고 20대 후반, <부하린: 혁명과 반혁명의 사이>를 쓰면서 부하린이 1912년 망명 중이던 레닌을 찾아가 만난 곳이 폴란드 남부의 중세도시 크라쿠프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10여년 전 마침내 크라쿠프에 가 봤을 때 중세유럽에서 가장 넓었다는 광장과 그곳 사람들이 갖고 있는 유럽의 문화수도라는 자부심에 깜짝 놀랐다.

폴란드는 1795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된 이후 123년간 세계지도에서 흔적이 사라졌다가 1918년 1차 대전 종전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영향 아래 독립했다. 그러나 1939년 독일과 소련의 동시 침공을 받아 바르샤바가 폐허로 변하는 경험을 했고, 2차 대전 후 소련의 영향력 아래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 소련에 의해 폴란드 군인과 경찰관 등 2만여명이 살해되어 암매장당하는 카틴숲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2010년에는 카틴숲 학살 70주년 추모식에 참석하러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폴란드 대통령 등 정부 요인 80여명이 모두 사망하는 불행한 사고가 있었다.

무수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1980년대 후반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힘으로 동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민주화 이행을 시작했고 주기적인 정권교체와 정당정치가 이뤄지는 동시에 유럽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는 나라다. 과거사 청산을 위한 노력도 철저해서 1997년 정화법을 제정하고 국가기억원을 세워 100여곳의 자료보관소에 누적 두께로 9.3㎞에 달한다는 과거의 비밀문서를 파손 없이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국가기억원에는 또한 검사를 파견하여 비밀경찰에 협력한 사람들을 파악해 공직에서 배제하고 기소와 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그렇지만 폴란드의 체제전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1999년 나토 가입과 2004년 유럽연합 가입일 것이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폴란드는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서구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여전히 에너지의 3분의 2를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폴란드 농산물의 대부분을 러시아에 수출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2018년 완공 예정으로 미사일방어(MD)기지를 폴란드 내에 건설하면서 자발적으로 미국을 불러들였다. 러시아와의 역사적 악연에 따른 두려움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다음 목표는 폴란드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스스로 미-러 대결의 각축장이 되는 것도 불사하게 만든 셈이다.

폴란드는 열강에 둘러싸여 시달리면서도 민주화를 이룩했고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사법 개악 시도에 반대해 촛불집회를 통해 저항하는 모습도 한국과 닮았다. 다만 한국은 촛불집회 대신 촛불혁명이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 두 축은 ‘재벌’과 ‘미국’일 것이다. 혁명이 기존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는 점에서 이 두 축에 대한 도전이 없다면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어렵다. 촛불집회를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한 것은 맞지만 부풀려진 개념을 쓰면서 현실을 공허하게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이상이 현실을 견인할 것을 기대하지만 때로 이상은 무기가 되어 현실을 파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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