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21 20:20
수정 : 2017.08.21 20:23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급여를 받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주장과, 받는 임금만큼의 값어치를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맞섰다. 이러한 대립의 배후에는 각자의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상호작용을 어떠한 원리에 기초해 운영할지에 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사회적 규범’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입장과,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얼마나 가져갈지는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입각한 시장거래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입장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순수하게 개인적인 이익의 고려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던 적은 없었다. 오래전에는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자신의 평판을 신경쓰며 가격을 불렀고, 사회적 규범을 염두에 두며 거래에 임했다. ‘공정가격’에 비해 높게 청구하거나 낮게 지불하려는 것은 세상을 떠받치는 도덕적 질서의 위반이자 절도로 여겨졌다. 오랫동안 잊혀 있던 칼 폴라니에 따르면 “시장은 본성상 사회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시장이 항상 사회적 규범의 지배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사회의 간섭 없이 경제생활 전체를 스스로 조직하려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사람들은 사회의 보호막이 사라진 시장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홀로 입증함으로써 생계를 꾸려야만 했다. 그 결과 유례없는 물질적 번영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열의 낙오자가 속출했고, 광범위한 불안과 반발이 파시즘으로 이어졌다.
케인스는 폴라니와 마찬가지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하려면 경제에 대한 개입을 통해 완전고용을 이루고 모든 이에게 경제적 역할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에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개입은 독재와 비효율과 빈곤으로 귀결된다고 맞섰지만, 현실은 케인스 편이었다. 2차 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시장을 사회의 통솔 아래 다시 두려는 의식적 노력으로 30년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던 반면,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그 흐름이 뒤집힌 오늘날에는 고단하고 불안한 삶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은 옳다. 하지만 그러려면 경제적 삶의 최종 심판관은 시장이 아니라 사회라는 원칙을 세우고, 시장을 민주주의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고 동료 시민들과의 연대에 의해 그 통제력을 강화하며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우리의 삶을 안전하고 품위있게 만들려면 경제적 활동과 부를 어떻게 조직하고 사용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좋은 규범을 만들고 이를 시장과 경제활동 속에 제도화하는 것은 정책의 몫이다. 케인스는 공적 의식이 투철하고 지혜로운 관료가 정책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폴라니는 각자가 자신의 경제적 터전에서부터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그 속에서 검증된 시도들이 정부의 구체적 정책 결정에도 반영되는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경제는 자유시장에, 정치는 직업정치인들에게, 정책은 전문 관료에게 맡기던 ‘20세기의 분업’이 아니라 민간과 시민사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유형의 정책가들이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도 수시로 왕래하는 ‘21세기의 분업’을 꿈꿔본다. 그럴 때 비로소 시장이냐 정부냐의 소모적 논쟁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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