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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8.31 18:33 수정 : 2017.08.31 20:35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택시운전사>는 봉쇄에 대한 영화이다. <택시운전사>는 관객들을 광주 ‘안’으로 이끌어가지만, 결코 바깥에서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을 넘어서기 어렵게 만든다. <택시운전사>는 오히려 관객을 광주 ‘바깥’에 머물도록 강제하는 영화로 보인다. <택시운전사>는 극장에서의 동일화를 통해 관객이 바깥 자리를 넘어설 수 있다는 환상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물론 <택시운전사>에는 동일화를 차단하기 위한 복잡한 영화적 장치나 사유의 난해함을 유발하는 서사적 복잡함이 없어 보인다. 이런 효과를 유발하는 것은 바로 광주 봉쇄, 즉 봉쇄된 광주 그 자체이다.

학살은 봉쇄로 가능했고, 학살 이후에도 지속된 봉쇄는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학살당한 ‘폭도’들은 봉쇄된 채 파묻혔고 ‘선량한 시민’들은 물질적 봉쇄로 인해 정보를 차단당했고, 왜곡된 정보를 믿었고, 그 믿음이 사실이 되었다. 학살, 정보 왜곡, 왜곡된 정보의 사실화가 광주에 대한 상징적 봉쇄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광주는 ‘국가 기념’을 통해 복권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상징적 봉쇄에 갇혀 있다. 첩첩산중 오솔길까지 봉쇄당한 광주를 감상하는 내내 관객은 물질적 봉쇄가 바로 학살 그 자체의 토대였다는 것, 그리고 학살 이후 지속한 상징적 봉쇄가 그 학살을 정당화해온 물질적 기반이었다는 것을 말없이 실감한다. 이러한 말 없는 실감이 관객에게 설명할 길 없는 부채감을 유발한다.

“특정 집단을 표적으로 만들고(손가락질하기),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딱지 붙이기), ‘선량한 시민’과 분리하고(게토화), 사회에서 분리하고(수용소화), 절멸하기(최종적 해결)”는 파시즘의 학살 단계이자 원리이다. 혐오 발화나 차별 선동으로 번역되는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비판과 규제는 바로 이러한 파시즘의 학살 원리가 반복되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시도이다. 한국에서는 혐오 발화가 혐오 문제나 언어 표현으로 환원되어 이러한 학살의 원리에 대한 정교한 접근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근대사는 봉쇄의 역사다. 광주 봉쇄가 ‘폭도’를 척결하는 군사작전으로 정당화되었던 것은, 단지 베트남전의 경험 때문은 아니다.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군사작전을 이유로 야간통행금지가 일상화된 사회였다. 야간통행금지는 일제 말기 전시 동원 체제에 정교하게 구축된 봉쇄 작전을 미군이 계승한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행위, 고정된 직장에 등록하지 않고 자의로 노동하는 행위를 처벌하거나, 학생들이 시내나 교외로 나가는 것을 처벌하는 것은 전시 동원 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학생들은 시내도 교외도 나가서는 안 되고 학교 운동장에 모여 남학생은 군사 훈련을, 여학생은 붕대 감기나 후원 물품 만들기를 위해 ‘벤치’를 지켜야 했다. 사람들의 일상 공간은 운동장, 일터, 시내, 교외, 거주지를 막론하고 전시 작전의 명분으로 통제되고 분류되고 배치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1980년대에도 군사정부하에 번성한 성 착취 산업과 인신매매에 대한 공포로 특정 남성 집단을 제외한 사람들은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수류탄 던지기가 축구로 바뀌었을 뿐인 학교 운동장에서 ‘벤치’를 지키고 있는 여학생들은 여전히 전시 체제를 살고 있다. 공간의 성격을 막론하고 봉쇄된 삶은 이렇게 전쟁 중인 삶이 된다. 봉쇄를 해제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러니까 전시 동원 체제에서 해방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활보할 권리를 위한 투쟁이 여전히 반파시즘 투쟁이고 페미니즘이 차별 반대의 반파시즘 투쟁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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