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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28 17:50 수정 : 2017.09.28 19:10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내가, 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정신대 피해 신고 접수처’가 설치된 동사무소를 찾은 영옥의 이 대사는 영화 <귀향>의 대표 대사로 기억된다. 영화 <눈길>에서 종분은 평생 위안부 피해 생존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친구 강영애의 이름으로 산다. 종분은 영애의 오빠를 찾기 위해 동사무소에 민원서류를 내러 나오며 세상으로 나온다. 김숨의 소설 <한 명>에서 재개발 예정지에 불법으로 거주하는 그녀 역시 실거주자 확인을 위해 찾아오는 공무원을 피하느라 숨어 지낸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9급 공무원 민재와 위안부 피해 생존자인 옥분을 중심으로 구청 민원센터가 아예 주요 무대가 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발표된 위안부 서사에는 모두 민원창구의 공무원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민원창구의 반복 등장은 위안부 서사의 이례적인 흥행의 ‘비밀’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기존의 위안부 서사와 단절적인 면모도 돋보인다. 그러나 기존 위안부 서사의 흔적을 도드라지게 새겨넣은 독특한 서사 구성이야말로 빛나는 지점이다. <귀향>에서 영옥 역을 맡았던 손숙이 옥분의 친구 정심으로 등장한다. 고통을 나눈 우정의 징표는 엄마가 손수 수를 놓아 만들어준 괴불노리개(<귀향>)와 목화솜(<눈길>)에서 꽃무늬를 수놓은 손수건으로 이어진다. 죽은 친구는 생존자에게 삶과 죽음을 기록하는 저항의 무기로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남겨주었고(<눈길>)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영어 공부로 이어진다.

<눈길>에서 친구 영애는 죽기 직전 종분에게 그곳에서 함께 찍은 소녀들의 사진을 남긴다. 종분은 평생 그 사진을 간직했고, 친구의 혼을 배웅하며 사진도 함께 제사 지낸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소녀들의 사진은 전세계인 앞에서 역사의 증거로 제시된다. <아이 캔 스피크>는 <눈길>에서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매장된 사진을 이어달리기 주자가 바통을 이어받듯이 전달받아 역사의 법정에 올려놓는다.

이런 이어쓰기는 작가나 감독의 의도만이 아니라 위안부 서사의 어떤 특이성에서 비롯된다. 옥분이 미 하원에서 “나는 모든 피해자를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섰다”고 진술하듯이 위안부 서사는 한 위대한 개인의 증언이라기보다 집합적 쓰기의 실천이다. <아이 캔 스피크>의 성취는 기존의 서사를 이어쓰고, 바꿔쓰는 집합적 쓰기의 실천으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한 데 있다. 반복되는 공무원의 역할 역시 의도나 설정보다는 한국 위안부 서사의 무의식처럼 보인다. 민원센터 공무원은 위안부 생존자들이 국가와 만나는 ‘창구’ 역할을 한다. 생존자들에게 국가는 민원창구로만 현현한다.

국가 부재의 삶,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국가 부재의 삶을 산다. 피해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던 ‘창구’는 이제 합리적이고 다정하고 적극적인 파트너로 무대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무대는 여전히 민원창구이고, 주체 역시 민원 담당 공무원이다. 당사자와 민간 시민단체와 온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을 위해 분주할 동안 국가는 여전히 ‘창구’ 역할만 반복한다.

<귀향>에서 <아이 캔 스피크>까지 위안부 서사의 이례적 흥행은 민원창구 역할을 넘어서지 않는 ‘국가’에 대한 답답함을 해소할 출구를 찾으려는 집합적 힘의 발현이다. 위안부 서사의 흥행 비결은 미적 성취나 재현 방식이 아닌 집합적 힘의 정치적 동력에 있고, 그 힘이 민원창구를 넘어 다른 차원을 매번 열어낸다. 이 집합적 힘은 민원창구를 넘어 새로운 사회적 창구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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