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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0.01 17:42 수정 : 2017.10.01 19:09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생각할 때 우리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진 나라는 독일이었다. 독일은 분단 과정에서 국제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고 냉전 시기 좌우 이념 대립을 대표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분단 상황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동·서독이 직접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전을 겪은 이후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반도의 상황과는 다르다. 반면 최근 주목을 받는 북아일랜드 사례는 식민지배와 내전을 거쳤고 구교도 공화주의자와 신교도 통합주의자 사이에 폭력적인 갈등이 지속됐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현실에 시사점이 있다.

1922년 아일랜드의 공식적인 독립 이후 영국의 일부로 남은 북아일랜드는 자치정부를 구성해왔지만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었고 1972년 영국 정부가 자치권을 회수하고 직접 통치를 선언함으로써 또 다른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후 언어 인정 등 정체성 투쟁과 사회경제적 차별이 중첩된 양측의 갈등은 1998년 성금요일 협정으로 큰 고비를 넘게 된다. 이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적대적인 세력의 상호 인정을 통해 권력분점 정부 구성에 합의하고 아일랜드는 헌법 개정을 통해 북아일랜드를 포함하던 영토조항을 수정하면서 서로가 상대방을 멸절하는 통일을 배제하고 평화적 공존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원인은 정책, 리더십, 국제적 차원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정책적 요인으로 이 협정은 북아일랜드 내 다양한 정당 및 시민단체가 합의한 다자협약과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가 맺은 국제협약의 두 가지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즉 시민사회를 평화협정의 주체로 이끌어내는 공동체 교섭 과정을 통해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가장 독특한 모습인 다자협정이 체결되었고 이 다자협약의 이행을 정부 사이의 조약을 통해 보장하는 형식을 취했다. 물론 양국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2007년에 성립된 진정한 의미의 첫 연립정부는 급진파인 신페인과 민주통합당 사이에 구성되었다.

리더십 요인으로는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역할과 1998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사회민주노동당 존 흄과 얼스터통합당 데이비드 트림블의 노력을 들 수 있다. 블레어 총리는 1840년대 대기근으로 아일랜드 국민 120여만명이 굶어 죽는 상황을 영국 정부가 방치한 사실에 대해 1997년에 영국 정부 대표로 첫 공식 사과를 한 바 있다. 그는 1998년 5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평화협정을 가결시키기 위해 협정안이 갖는 건설적인 모호성을 최대한 이용해서 아일랜드공화군(IRA)의 무장해제가 곧 이뤄질 것처럼 국민을 속였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아일랜드공화군의 무장해제는 2001년 10월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의 성공에서 가장 큰 역할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지원으로 대표되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북아일랜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1995년부터 2013년까지 3기에 걸쳐 12억5600만유로를 공동체 건설과 신뢰 구축, 청년 교육 등의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미국 역시 ‘아일랜드국제기금’을 통해 1986년에서 2010년 사이에 8억9500만달러를 지원했다. 북아일랜드는 이러한 노력들이 합쳐져 평화협정 이전 30여년 동안 3천여명이 사망했던 끔찍한 시기를 지나 더블린 출신의 버나드 쇼가 <존 불의 다른 섬>에서 그렸던 “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 나라”에 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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