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23 17:51
수정 : 2017.10.23 19:01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사피엔스의 미래를 놓고 우리 시대의 지성들이 설전을 벌였다. 알랭 드 보통과 맬컴 글래드웰의 현란한 말솜씨도 인상적이었지만, 저명한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보인 경제학에 대한 신뢰는 충격적이었다. 인류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근거를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찾았던 것이다. 기후변화처럼 복잡한 문제를 효율성의 잣대로 접근하는 경제학자들에게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반박이 있었지만, 본연의 주제로 돌아가야 했기에 논의는 중단되었다. 경제학자들이 금융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점은 짚어지지 않았다.
사실 경제학의 역할에 대한 ‘환상’은 보편적 현상이다. 경제학은 사회과학 중 가장 견고한 학문으로 공인되었고, 정책결정 과정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1930년대 초반 라이어널 로빈스는 주어진 목적을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단들을 찾아내는 합리적 선택의 학문으로 경제학을 새롭게 정의했다. ‘경제학=최적화+균형’이라는 방정식이 확립되었고, 효율적 자원배분의 심판관 자리를 시장이 차지했다.
60년이 지난 1995년, 미국 시카고대 법대에서 한 경제학자의 발표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경제적 선택을 할 때 이미 지불한 비용, 곧 매몰비용은 무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려해 행동하고, 자발적 협상으로 쌍방이 더 나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데도 합의하지 않는 사례들을 거론했다. 합리성을 가정하는 모형은 잘못된 예측을 내놓을 것이라는 대목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법적 판단에 경제학의 사고방식을 도입하는 데 앞장선 리처드 포즈너 연방판사가 외쳤다. “귀하는 정말로 비과학적이군요!” 당신은 경제학자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20년 전의 그 경제학자가 바로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탄 리처드 세일러다. 현실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는지를 관찰과 설문과 실험을 통해 철저하게 따져보자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현대 경제학의 핵심 기둥을 흔들었다. 저명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많은 경제학자의 분노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현대 경제학의 분석틀과 언어를 공유하며 내부에서의 변화를 꾀했고, 배교자는 마침내 최고의 경제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경제학이 추상적인 모델에 힘입어 복잡한 현실의 핵심을 포착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이지만, 가치판단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고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성찰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도덕’과학이라고 믿었다. 20세기의 경제학은 ‘도덕과학’이 아니라 로빈스가 제시한 ‘경제과학’의 길을 걸었다. 경제학을 자연과학에 가깝게 만들려는 시도들과 함께 사람들의 동기와 기대, 심리적 불확실성은 모형에서 사라졌다. 경제학은 엄밀하고 견고한 학문이 되었지만 현실 설명력은 약화되었고, 물질적 풍요에도 삶의 만족도는 떨어졌다.
세일러의 작업은 케인스를 계승해 도덕과학을 다시 세우려는 시도로도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의 경제적 행동 속에서 이득에 대한 계산과 도덕에 대한 고려가 다양한 편향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밝혔고, 비합리적 행동 속에서 모종의 일관성을 포착해 경제이론의 예측능력도 높였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적 지향과 방법론이 상이하고 정체성이 다른 경제학도 존재한다. 공동체의 목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질적 부를 어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나눌지의 과제를 놓고 펼쳐지는 여러 도덕과학의 백화제방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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