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29 19:00
수정 : 2017.10.29 19:26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48년 5·10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시한 우리나라 정부 형태의 원안은 의원내각제였다. 당시 선거에서 제1당을 차지한 한민당과 제헌의회 다수는 이승만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1948년 6월21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제를 관철할 논의를 위한 전원위원회 개최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이 헌법하에서는 어떤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며 장외 정치투쟁을 선언하였다. 그날 밤 한민당 중진 의원들은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다음 날 대통령중심제로 급히 바꾼 헌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의원내각제는 정치지도자 훈련과 정치의 연속성, 지지와 대표의 일치 차원에서 장점을 가진 제도다. 의원들은 정부의 각 부처를 돌면서 국정 현안을 파악하고 정책 결정의 훈련을 통해 지도자로 성장한다. 또한 국민의 지지와 정당의 지지가 불일치할 때 언제든지 내각 불신임과 의회 해산을 통해 새로운 선거를 시행함으로써 지지와 대표를 일치시킬 수 있다. 특히 의원내각제는 일찌감치 전문정치인의 길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정치와 비정치 영역을 뚜렷하게 분리하여 사회 각 분야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의원내각제가 채택된다면 가장 찬밥 신세가 될 곳은 아마도 교수 사회일 것이다. 대통령제 아래서 관료는 어느 교수가 언제 장관이나 위원장으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대우하면서 보험을 든다. 그러나 아무리 이론적으로 좋은 제도라고 해도 국민이 싫어하면 도입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의원내각제에 대한 지지가 낮은 이유는 첫째, 87년 직선제 개헌을 통해 쟁취한 대통령 직접선출이라는 승리의 상징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고, 둘째, 국회의원에 대한 낮은 신뢰와 그들이 재벌과 결탁해 권력을 사유화할 경우 국민이 직접 견제할 방법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
대통령중심제는 신속한 의사결정과 책임정치 구현의 장점이 있지만 체계적인 정치훈련 없이 누구나 출마 가능하고 대통령 개인의 자질에 따라 정부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 4년 중임제가 채택될 경우 첫 임기를 재선에 전력투구하고 재선에 성공하면 다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정권 재창출에 나설 것이다. 어떤 이들은 8년마다 정권교체가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현실은 16년 만에 정권교체가 겨우 가능할지 모른다. 한 세력이 16년을 집권하면 승자독식의 정치문화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반대편은 인적·물적 토대가 붕괴하여 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도 나름 지지세가 있는 이유다.
우리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아홉 차례의 개헌을 해 온 과정은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정치인의 존재와 그들을 따르는 정치세력의 이해에 결국 좌우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시작된 개헌 논의에는 그런 존재감의 정치인이 없다는 점에서 시민 참여형 개헌이 필요하고 또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다만 1987년 개헌은 대통령 직선이라는 개헌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분명하여 국민적 합의가 쉬웠다면 지금은 특정 정부 형태의 선택이 어떤 차이를 가져올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시민들의 의견이 중요하고 헌법이라는 문서의 계약 당사자로서 시민들의 선택이 개헌 논의의 중심을 이뤄야 할 필요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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