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9 17:57
수정 : 2017.11.29 19:10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에 서명한 사람의 수가 23만명에 달하면서, 청와대의 입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은 모두 오래전부터 낙태를 비범죄화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73년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임신 3개월 이내의 여성이 낙태를 결정하는 것은 사생활의 자유에 속함이 인정되었고, 프랑스에서는 1975년부터 임신 12주(마지막 생리 후 14주)까지 낙태의 권리가 인정되고 있다(이 기간이 지나면 의사의 판단이 있을 때만 낙태가 가능하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낙태죄 폐지 운동은 미국이나 프랑스와 비교하면 40년 이상 늦은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곳곳에서 거센 반발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한국 사회는 낙태에 대해 이다지도 보수적일까? 한국인들이 유달리 생명 존중 사상이 강해서일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만일 낙태에 반대하는 이유가 생명에 대한 존중 때문이라면, 낙태의 유혹을 뿌리치고 아이를 낳은 비혼모들은 용기 있는 여성이자 훌륭한 어머니로 존경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복지 사각지대에 방치된 채 편견과 멸시에 시달린다. 비혼모의 처지를 취재한 기사에는 예외 없이 “자기가 좋아서 싸질러 놓고 왜 징징대냐”는 식의 댓글이 달린다(실제 댓글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아기가 배설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싸지른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는 것, 이것이 생명을 존중한다는 한국인들의 언어 수준이다. 이런 댓글들을 읽다 보면,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임신과 출산은 방탕한 여자에게 내려지는 벌이다. 아이는 축복이 아니라 벌이자 짐인 것이다.
벌로써 갖게 된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학대 속에서 자라게 되지 않을까? “어쩌다 내가 너를 낳아서…” 같은 말을 들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전혀 근심하는 것 같지 않다. 아동학대가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 자체가 최근의 일이다. 그 전에는 아이를 내다버리지만 않으면 ―즉 ‘사회’에 책임을 떠넘기지만 않으면― 때리든 굶기든 부모의 자유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일가족 동반자살’에 대한 온정적 태도 속에서도 나타난다. 동반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아이들만 죽이고 자기는 살아남는 게 보통이지만― “아이들은 내가 데려간다”는 말로 사회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오죽 키우기 힘들었으면…”이라고 혀를 차면서 그의 선택에 공감한다. 여기에는 부모 없는 아이는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확신, 더 정확히 말하면 부모 없는 아이를 우리가 떠맡을 수는 없다는 냉정함이 깃들어 있다.
나는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낙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특히 목사들)이 이미 태어난 생명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그 생명들이 제대로 자라는 데 자신은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길 바란다. 예를 들어 세금은 제대로 내고 있는지 말이다.
한국 사회는 아이를 환대하는 사회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충격적일 정도로, 아이가 짐스럽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한다. 나는 이것이 원치 않는 출산의 강요와도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낙태를 비범죄화하고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는 나라는 오히려 출산율이 높다. 그런 나라에서는 엄마들이 더 행복하고, 당연히 아이들도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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