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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30 17:55 수정 : 2017.12.01 15:35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미사일과 애호박으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훗날 역사가들은 2017년의 미디어 담론을 보며 미사일과 애호박에 대해 의문을 품을 만하다. 1930년대 자료를 보며 비슷한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왜 반찬 타령이며 여성(주부)의 생활 습성이 왜 문제인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일이 파시즘과 젠더 정치 연구의 핵심이다.

여성 혐오는 역사를 초월한 원초적 현상이라고 강조하는 논자도 많지만, 여성 혐오의 작동은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다. 몇년 전보다 혐오발화에 대한 논의는 활발해졌지만, ‘혐오’라는 포괄적이고 원초적인 정서로 환원되는 논의의 한계는 여전하다. ‘혐오’는 역겨움(disgust)에서 증오까지를 함축해버려서 매번 논의에 혼란을 일으킨다. 번역 문제가 아니다. 역겨움은 사회적 차별뿐 아니라, ‘입맛에 맞지 않는’, ‘비위에 거슬리는’ 등의 주관적인 취향과 정서를 포괄한다. 차별을 입맛이나 주관적 정서의 문제로 환원하면서 오히려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쉽게 전유된다. 나아가 혐오를 신체에 각인된 원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논의는 차별을 구조와 역사의 문제로 사유하는 것을 막아, 신체의 원초성에 고착시키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의 알리바이가 되기도 한다. 혐오발화 비판은 “혐오를 혐오로 되돌려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한국에서 성차별이 지배적인 것은 여성 혐오의 원초성 때문이 아니라 증오 정치를 경험한 역사에서 비롯된다. 혐오발화라는 개념은 증오 정치, 즉 파시즘에서 비롯되었다. 파시즘의 증오 정치는 자발성, 매혹과 같이 정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특정 정서(증오와 같은)의 원초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파시즘은 자본의 전지구화, 대공황, 양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특정한 역사적 국면의 산물이다. 1990년대 후반 탈냉전과 자본의 전지구화가 국지전과 테러로 이어지면서 파시즘과 혐오발화 문제가 다시 역사의 화두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이다. 파시즘이 원초적이지 않고 역사적이라는 것은 구체적인 혐오발화를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화에 등장하는 ‘종북 게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학살을 예고한다. “성소수자는 사회의 정상성을 침해하고 무너트린다. 그것은 ‘종북’이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성소수자는 국가의 적이다. 그래서 국가 내부의 적을 색출하듯이 성소수자도 색출되어야 하며 국민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수도 없다. ‘종북’처럼 성소수자도 위장된 적이며 국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건 음모이거나 ‘특혜’이다. 적을 처단하는 전쟁은 국가와 국민의 성스러운 권리이다. 따라서 적인 성소수자를 처단하는 게 국민의 권리이다.”

“종북 게이”라는 짧은 표현은 성소수자 학살을 ‘국민’의 권리로 정당화한다. 파시즘은 바로 이런 논리로 학살을 ‘적’에 대한 국가의 ‘합법적 폭력’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막상 “종북 게이”라는 ‘적’은 실제로는 동등한 국민이라는 딜레마가 파시즘에 발생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해준 것은 세계대전과 대공황이었다. 전쟁 위기와 경제 불황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없던 지역/국가에서 내부의 적을 색출해서 불태우는 파시즘 정치에 ‘국민’들이 열광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애호박을 둘러싸고 원초적 증오가 불타오르는 건 ‘한남’ 탓도 ‘메갈’ 탓도 아니다. 징후적인 건 이렇게 내부적 적대가 미사일과 함께 강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미사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스스로 초토화되는 것, 무한 적대가 불타오르는 이곳에서 파시즘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애호박’에 대해 정보가 없는 분들은 인터넷 검색창에 애호박을 입력하면 사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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