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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3 21:09 수정 : 2017.12.03 21:14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머지않아 <문화방송>(MBC)과 <한국방송>(KBS)에 새 임원진이 들어서면, 이명박근혜 정권의 야만적인 언론탄압 시대도 막을 내릴 것이다. 이제 마침내 ‘방송다운 방송’이 출현할 것인가. 기대가 큰 만큼 우려도 크다. 지금 한국의 방송은 공영, 민영 방송을 불문하고 민주공화국의 방송다운 사회적 의식과 품격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방송의 근본문제는 그동안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시나브로 민주주의의 적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한국의 방송이 민주주의의 적이 된 이유는 자명하다. “민주주의는 성숙한 인간을 필요로 하고, 성숙한 인간의 사회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체제”(아도르노)인데, 한국 방송은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기는커녕 국민의 미성숙 상태를 영속화하려는 조직으로 퇴화했기 때문이다.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랴. 리모컨을 들고 한번 돌려보라. 한국 방송을 보고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인이 성숙한 인간이 되고, 한국 사회가 성숙한 사회가 되고, 그럼으로써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여전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국민을 ‘미성숙 상태’에 묶어두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전략은 ‘우민화’와 ‘현혹’이다.

한국에서 방송이 존재하는 이유는 실로 우민화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영방송조차 국민을 얕잡아보며 이처럼 저질 방송을 양산하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한국의 방송은 더 이상 계몽의 매체가 아니라 몽매의 도구로 전락했다. 나아가 국민을 현혹하는 것이 한국 방송의 주된 기능이 되었다. 국민은 현실을 미화하는 화려한 불빛에 눈이 부셔 현실의 암울한 실상을 보지 못한다. 헬조선의 지옥은 한국 방송에 존재하지 않으며, ‘계급 없는 사회의 유토피아’는 미래의 공산사회가 아니라 현재의 한국 방송에 존재한다. 한국의 방송은 진실의 매체가 아니라, 거짓의 공간이 된 지 오래다.

일본이 기술·과학적 선진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사회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엔에이치케이>(NHK)에 있다는 지적은 결코 남의 얘기로 흘려들을 수 없다. 한국이 놀라운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인간의 결사체로서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는 주된 요인도 바로 한국 방송의 후진성에 있음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한다.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 1986년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독일 공영방송을 지배하는 정신이고, 독일 민주주의를 지켜낸 방패이다.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강한 자의식과 자긍심을 가진 독일 방송인들을 볼 때마다 경외감을 느꼈다.

2000년대 초반 티브이 책 프로에 패널로 나가면서 젊은 피디들과 만날 기회가 잦았다. 당시 그들은 자신을 ‘민주주의의 소총수’라고 불렀다. 맞다. 방송인은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전사다. 이 땅의 허약한 민주주의가 다시는 ‘야만’의 시대로 퇴행하지 않도록, 방송인은 각별한 역사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져야 한다. 보도, 시사 프로 등을 통해 무너진 정치적 공론장을 복원해야 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방송의 질적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려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방송, ‘성숙한 인간을 길러내는’ 방송- 이것이 방송개혁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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