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27 18:37
수정 : 2017.12.27 19:33
김현경
문화인류학자
2002년 4월22일치 <동아일보>는 대치동 학원가의 ‘선행학습’ 열풍에 대한 심층 취재를 싣는다. 초등학생들이 수학경시대회를 준비하느라 밤 9시까지 학원에 다니고, 중학교 과정을 미리 당겨서 공부하는 것은 물론, 고교 과정인 미적분을 배우기도 한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전혀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선행학습’이라는 단어 자체를 처음 듣는 사람이 많았다.
‘선행학습’은 왜 이 시기에 갑자기 시작된 것일까? 1999년 12월에 국회를 통과한 영재교육진흥법에 답이 있다.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경로로 영재를 선발하여 적합한 교육을 시키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법은 입시 경쟁을 시작하는 나이를 초등학교 5학년으로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울대에 들어가려면 영재·과학고에 들어가는 게 좋고, 영재·과학고에 들어가려면 중학교 때 영재원 경험이 있는 것이 좋으며, 영재원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자식 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새로운 상식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자사고와 외고를 폐지한다는 말은 있어도 영재고, 과학고를 폐지한다는 말은 아직 없으니, 우리는 당분간 이런 과열된 풍경을 계속 보아야 할 듯하다.
영재교육진흥법은 과연 얼마나 영재를 길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을까?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피사) 과학 점수를 가지고 살펴보기로 하자. 피사는 만 15세 청소년의 읽기, 수학, 과학 능력의 국제 비교를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주관하는 시험인데, 레벨 1에서 레벨 6까지 난이도가 상이한 문항들로 이루어진다. 오이시디는 레벨 2에 못 미치는 사람의 비율과 레벨 5 이상의 문제를 푼 사람의 비율을 한 나라의 교육의 성공도를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로 생각한다. 과학 영역에서 레벨 2는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과학적 사고능력에 해당된다. 레벨 2 문제를 풀 수 없는 사람은 과학적 리터러시가 결여된 상태, 다시 말해서 일종의 문맹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최고 난이도에 속하는 레벨 5와 레벨 6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사람은 미래의 인재로 간주된다.
영재학교가 문을 연 해인 2003년, 피사 과학 분야에서 한국은 레벨 2 미달자의 비율이 6.8%로 오이시디 국가 중 가장 낮은 축에 속했다. 2015년 이 비율은 14.4%로 솟는다. 반면에 2003년 12.2%였던 레벨 5 이상의 비율은 10.6%로 줄어든다.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학원에서 ‘영재교육’을 받은 결과가 이것이라고 생각하면 허탈하지 않을 수 없다.
영재학교가 존재하지 않는 핀란드와 비교해보면 허무한 생각이 더욱 커진다. 핀란드는 영재들을 선별하거나 특별하게 대우하지 않는다. 질 좋은 교육을 일부 학생이 독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학생이 최상의 과학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핀란드 교육의 원칙이다. 그런데 핀란드는 과학에서 레벨 5 이상인 학생의 비율이 언제나 한국보다 높다. 한국은 가장 높았을 때가 12.2%인데, 핀란드는 14%에서 21% 사이를 오간다.
2006년에서 2015년 사이 교육 불평등이 감소되는 것이 전세계적인 추세였다. 하지만 한국은 반대로 가고 있다. 읽기, 수학, 과학에서 학생들의 성취도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영향받는 정도가 더욱 커졌다. 이 기간 동안 한국보다 교육 불평등이 더 심해진 나라는 인도네시아뿐이다. 수월성 교육의 득과 실을 심각하게 따져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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