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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25 18:30 수정 : 2018.01.25 19:00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학회와 초청 강연으로 잠시 미국에 다녀왔다. 학회에서 만난 학자들은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관심을 보이며 궁금해했고 ‘과열된 민족주의’ 등의 진단에 대해 여러 질문을 했다. 과열된 민족주의에 대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를 바탕으로 그런 판단을 하게 되었는가 되물었다. 청소년들이 위안부 문제에 매우 열성적인 건 민족주의의 영향이 아니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유사한 질문을 최근 자주 받게 된다. 구체적인 조사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청소년들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에 많이 참여하는 것은 민족주의라는 층위보다는 영어 연수를 중심으로 한 교육 기회의 계급화라는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민족과 계급의 규정성은 87년 체제와는 전혀 다른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 실제로 출장길 뉴욕행 비행기에는 영어 연수 가는 고등학생으로 가득했다. 영어 연수가 이미 필수가 되었다고도 하지만 미국으로 영어 연수를 갈 수 있는 고등학생은 많지 않다. 이민에서 동남아 연수까지 영어를 향한 길도 계급에 따라 잘게 갈려 있다.

이민이나 (조기) 유학을 갈 수 없는 계급에서 대학 입시는 ‘절대적’ 차선책이다. 현재 대입 제도에서는 학생들의 체험 활동, 동아리 활동이 매우 중요하고, 이런 활동 역시 계급에 따라 관리된다. 역사 관련 활동은 글쓰기 등 창작 활동과 함께 비용이 적게 들고 부모의 관리와 조력 없이도 할 수 있는 대표적 활동이다. 참여자의 동기를 모두 동일화할 수는 없지만, 선택지의 유형과 특성 차원에서는 그렇다. 청소년들이 위안부 문제 활동에 발걸음을 향하게 되는 동력을 민족주의라고 보는 건, 영어 연수 비행기에 오르는 게 탈민족주의라고 해석하는 것만큼 피상적이다. 여러 요인으로 세대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지만, 경쟁 체제에서 살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와 통일과 평화를 당연시하는 586세대라는 구별은 ‘청소년, 위안부 문제, 민족주의’에 대한 인상비평만큼이나 공허하다.

세대론과 색깔론, 정치 팬덤의 분할 속에 ‘평화’는 허공에 붕 떠 있다. 평화롭게 죽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던 박완서는 “자기들만 탈출 티켓을 가진 정치 관료들의 위기설과 비국민 사냥에 저항하라”고 외쳤다. 1950년에서 수십년이 지나 모두가 자유롭게 해외로 나갈 수 있다는 세상이지만 그 자유는 돈 없이는 선택 가능성조차 없다. 가상화폐 차익을 위해 해외를 들락거리며 사고팔기를 하는 ‘젊은 세대’가 많다지만, 여권조차 없는 젊은 세대가 더 많고 이들의 목소리는 세대론의 이름으로도 전해지지 않는다.

모두가 저마다의 불안 속에 각자의 지옥을 사는 현실, 일상의 평화를 지탱할 공동체도 이미 붕괴하였는데 과연 무엇을 주는지 알 수 없는 ‘민족과 통일’을 향한 ‘평화’가 온전히 마음에 와닿기는 힘들다. 통일을 향한 ‘민족 공동체’의 평화가 많은 사람의 삶과 마음에 내려앉기 위해서도 무너진 공동체를 대신할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 문제는 ‘누가’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이다. 지옥 같은 경쟁 체제와 교육 시스템을 이유로 가족의 일부나 전부를 해외로 보내는 해외 탈출이 지식인 사회의 일반적 삶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한국 사회 대부분 사람이 그 지옥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해 ‘진보’나 ‘비판적 지식인’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고 발언권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지옥에 남아야 할 의무가 있다. 지옥에 남아서 그 지옥을 함께 경험하고, 어떻게 지옥을 변화시킬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의무 말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탓하기 전에 당신 머리맡에 지옥 탈출 티켓은 몇장이나 있는지부터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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