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11 18:23
수정 : 2018.04.11 19:10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2주 전에 신입생 Y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 사고여서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대학에 입학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벌어진 일이다. 사고 소식에 급히 고향에서 달려온 Y의 부모님은 응급수술을 마치고 나온 아들의 모습을 보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거듭 수술도 하며 병원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Y는 여전히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하루에 단 두번인 면회 때 기계 덩어리와 연결된 아들의 부은 손을 잠시나마 잡아주는 것 외에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다림뿐이다. 가족과 친지들은 Y에 관한 이야기를 간간이 들려주며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어머니의 최근 기억 속의 Y는 좋아하는 농구를 하다 다리를 다쳐 학과 신입생 환영회를 안타깝게 놓쳤다. 갓 시작한 연애에 들떠 전화로 안부를 묻는 어머니에게 남산에 와 있다며 자랑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기숙사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던 아들이 서울로 떠나는 게 아버지는 못내 아쉬웠다. 서운함도 잠시, 부모님은 직장에서 바쁜 시간을 보냈고, 아들은 캠퍼스에서 수업과 학생회, 동아리를 부지런히 오갔다. 당연한 듯했던 일상이 사고로 뒤엉키기 전까지 말이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가족들은 Y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줍고 있다. 어머니는 Y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들을 몇번이고 다시 본다. 가족이 함께 제주의 오름을 걸었을 때 어머니가 찍어준 Y의 뒷모습도 보인다. 아들이 이 사진을 좋아했나 보다며 어머니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면회시간이 되어 병실을 들르고 나면 이마저도 슬픔에 묻혔지만 말이다. 가족들은 잠금 상태인 Y의 핸드폰 화면에 간간이 뜨는 문자 메시지도 놓치지 않는다. 사정을 모르는 학생은 조별 모임에 나오라며 채근하고, 이미 소식을 접한 친구들은 짧게나마 기도와 응원을 남긴다. 병실 밖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어린 동생이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했단 걸 알고 Y가 피식 웃을 날이 곧 오지 않을까?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어머니는 교정을 풍경 삼아 사진 찍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Y도 언젠가 이곳에서 멋쩍게 포즈를 취하지 않을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교수살이 일곱해 동안 최근 십여일만큼 학생을 생각해본 시간이 없었다. 경쟁과 효율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시공간에서 스톱 버튼이 없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탄 채 연구와 강의, 회의와 행사를 분주히 오갔다.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뿐 아니라 대부분 한국 대학은 ‘위기론’에 발목이 묶여 있다. 물론 호들갑은 아니다. 2020년 입시부터 대학입학 정원이 고교 졸업자 수를 넘어설 것으로 추산되며, 지난해 4년제 대학의 80퍼센트가 신입생 충원 미달을 경험했다(<중앙일보> 3월25일치).
1990년대 중반 대학 설립 요건을 대폭 완화하며 대학 난립을 자초한 교육부는 이제는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구조조정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수요’가 높은 대학과 학과만 살아남도록 시장논리에 맡기자는 주장도 범람하고, 재정 조달을 위해 외국인 유학생 규모를 늘리는 정책이 대학의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이 모든 논의에서 학생은 규모든 금액이든 숫자로 축약되기 십상이다. 위기론에 겁박당하기 전에 잠시만 생각을 비틀어보면 어떨까.
대학 진학 희망자 수가 현재 50여만명에서 5년 뒤 40만명까지 줄어든다고 말하는 대신, 40만명이나 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지식과 정보가 도처에 범람하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Y처럼 크고 넓은 세계와 연결된 40만명의 학생들이 굳이 대학을 찾는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환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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