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9.26 18:16
수정 : 2018.09.26 19:16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가을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명절을 맞았다. 선생의 마음은 파란 하늘을 훔치느라 한껏 들떠 있지만, 학생들은 곧 있을 학과 현지조사 준비로 분주하다. 올해는 복수전공생까지 포함해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강원도 정선 폐광지역에서 나흘간 현지조사를 진행한다. 여름철 폭염을 견디며 학생들이 예비조사를 다니고 직접 연구지를 물색했다. 진폐증 환자에 대한 의료인류학 연구에서 카지노 금융에 관한 경제인류학적 탐색까지 다양한 주제를 선정했다.
학교에서 부분적으로 경비를 지원하지만, 학생들도 오만원가량 현지조사비를 지출해야 한다. 올해도 형편이 빠듯한 몇몇 학생은 학과의 ‘잔디밭장학금’을 신청했다. 졸업생 네명이 재학생들의 학과 현지조사를 지원해주자며 장학금을 제안한 것이 2014년 초반의 일이다. 학과가 이제야 십주년을 맞았으니 동문이라 해봤자 앞날이 아득한 사회초년생들뿐이다. 그래도 선생들과 함께 좌충우돌의 역사를 쓰다 보니 저 스스로 학과를 만들어냈다는 자부심이 제법 컸나 보다. 사년 전 회식 자리에서 한 졸업생이 ‘잔디밭’이란 이름을 제안했다. “아슬아슬하게 한발씩 내딛다가 중간에 떨어져도 잔디밭이 있으면 덜 아프지 않을까요?”
잔디밭장학회를 만든 이 젊은 세대는 올해 추석에도 “싫어”만 외치는 관계 파탄의 주범으로 신문 지면에 등장하고 있다. 친척들의 잔소리도 싫고, 난데없는 관심도 싫다. 결혼 얘기도, 취직 얘기도 지긋지긋하다. 명절에 집에 가냐는 질문을 하는 게 머쓱할 정도로 실제로 많은 학생이 혼자서 조용히 휴일을 맞고 있다. 갈등을 대화로 풀기보다 아예 빗장을 걸어 잠그는 모습이 당황스럽다. 타인의 땀내를 맡을 필요가 없는 익명의 온라인 관계에서 적당히 우울감을 해소하는 풍경이 우려스럽다. 개인의 상품 가치를 극대화하도록 종용해온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제 덫에 걸린 모양새다.
하지만 잔디밭장학금을 집행하면서, 나는 청년들이 관계를 끝장내기보다 새롭게 만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장학회는 지원의 제공자도, 신청자도 대단한 의례를 요구하지 않는다. 장학금 취지에 동의하는 졸업생들은 소정의 금액을 매월 학교 발전기금에 적립할 뿐, 올해 어떤 학생이 어떤 이유로 돈을 받았는가에 대해 상세한 보고를 요구하지 않는다. 장학금이 필요한 재학생은 간단한 신청 절차를 밟은 뒤, 계좌로 입금된 조사비를 받아 현장연구를 수행하면 그뿐이다. 원조나 자선, 공공부조에서 흔히 발견되는바, 빚진 마음을 ‘도덕적’ 의무로 되갚아야 하는 불평등한 호혜관계를 ‘쿨하게’ 비껴간다.
감사편지나 인증샷 따위의 극적인 의례를 치르지 않아도 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보기엔 어떤 신뢰가 똬리를 틀고 있다. 누구에게나 생애 어떤 시기에 ‘잔디밭’이 필요하다는 공감, 상처받고 동요하는 시기에 한걸음 내딛도록 부축해준 친구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우리는 그렇게 때때로 보듬으며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공통 인식… 그러니 과하게 서로를 상찬할 일도 없다.
추석이 끝나면 정선 갈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관계를 없애고 좁히는 대신 새롭게 벼리는 젊은이들의 기술이 낯선 현장에서 어떻게 발휘될지 궁금하다. 뉴욕이나 도쿄보다 훨씬 낯선 장소가 되어버린 속칭 ‘지방’에서 이들은 어떤 관계의 기술을 보여줄까? 마음이 조급한 선생은 ‘잔디밭’이 학과에서 대학으로, 지역으로, 반도로, 지구로 확장될 때 펼쳐질 풍경을 그려보기 시작한다. 몽상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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