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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24 09:57 수정 : 2014.03.25 10:34

황현진 소설 <보다 그럼직한 시체놀이> ⓒ이현경



황현진 소설 <1화>



재하는 강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에 살았다. 시(市)를 세로로 관통하는 강의 오른쪽 동네였다. 그곳은 인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재하에겐 친구가 많이 없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재하를 친구로 삼은 가장 큰 이유였다. 나는 주로 재하네 집에서 놀았다. 우리 집은 강의 왼쪽 동네였다. 재하를 우리 집에 초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 집은 5층짜리 아파트였는데 한 층에 스무 가구가 살았다. 스무 가구 중 절반의 자식들이 나와 같은 학교에 다녔고, 그중 절반은 나와 같은 학년이었으며, 그중 절반은 나와 같은 반이었다. 나는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들과는 무슨 놀이를 하건 무슨 짓을 하건, 내가 반추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부모의 귀에 들어갔다. 나는 그게 싫었다. 집을 비우는 사람은 부모이면서 한나절 동안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꼬박꼬박 고해바쳐야 하는 쪽은 늘 나였다. 그건 무척 화가 나는 일이었다. 화를 내지 않기 위해선 거짓말이라도 늘어놓아야 했다.

혼자 집에서 책을 읽었어요.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 말은 맞벌이를 하느라 자식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부모의 양심을 찌르기엔 꽤 적합한 문구였다. 동시에 부모를 안심시키기에도 가장 적당한 말이었다. 내 부모가 나를 두고 걱정할 것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외아들인 내가 여느 아이보다 내성적이라는 것과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것. 그것은 걱정이라기보다 차라리 자랑과 안도에 가까웠다. 심지어 그들은 내게 친구가 없다는 사실조차 크게 괘념치 않았다. 내 부모는 정기적으로 내게 책 사주는 일 외에 달리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들이 각자의 업무에만 충실한 삶을 살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는 소리다. 나는 정반대였다. 내 방엔 나날이 책이 쌓여갔고 내겐 그것들을 읽어낼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나에겐 책의 내용을 간추려 부모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그 의무를 나는 재하의 누나를 통해서 해결했다.

재하에겐 누나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보다 세 살이 많았다. 그녀의 방에도 책은 많았다. 가난한 재하의 부모는 맏딸에게 여러 종류의 문학 전집을 사주곤 했다. 재하의 외숙모가 출판사 외판원이라고 들었다. 아마 재하 부모의 입장에서는 외숙모와 딸, 둘 모두의 청을 거절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 후 내 방에도 누나의 책들과 똑같은 것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되기 시작했다. 재하 외숙모의 수입도 점점 늘어났다. 날이 갈수록 재하의 부모는 더욱 가난해졌고, 내 부모의 퇴근 시간은 보란 듯이 늦어졌으며, 나는 더욱 뻔질나게 재하네 집을 들락거리다가 중학생이 되었다.

재하의 누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누나가 책을 읽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누나에게 더 이상 새 책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즈음 재하의 외숙모가 출판사 외판을 그만두고 보험사에 취직한 탓이었다. 재하의 부모는 아직 책의 할부금을 다 갚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외숙모의 보험 가입 권유를 모두 거절했다. 외숙모는 가난한 부모일수록 사망보험 가입이 필수라고 핏대를 세웠지만 재하의 아버지는 향후 30년간 우리 집에 장례식 치를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단단히 못 박았다.

30년이 아니라 40년이야.

재하의 엄마가 가쁜 숨을 달래며 꾸짖듯 말했다. 누구를 꾸짖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이 벌게지는 쪽은 언제나 재하의 아버지였다.

언니는 돈 욕심은 없으면서 명줄 욕심은 있나 봐.

비아냥거리는 쪽은 당연히 재하의 외숙모였다.




황현진(소설가)





황현진

2011년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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