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진 소설 <2화>
열네 살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재하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다른 또래들에게 들킬까, 염려 따윈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재하와 내가 서로 다른 중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재하는 시의 오른쪽 끄트머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와 붙어 있는 학교였다. 시에서 제일 역사가 오래된 학교이긴 했지만 해가 갈수록 평판이 나빠져 사람들이 꺼리는 학교가 된 지 오래였다. 나는 강의 왼쪽 동네 한가운데에 신설된 중학교에 입학했다. 동네의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새로 생겨난 중학교는 시의 역사상 유례없는 최신식 냉난방시설이 갖춰진데다 최초의 남녀공학이라는 이유로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중학교가 되었다. 여전히 재하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널 일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나는 꾸준히 재하네를 찾아갔다. 일주일에 서너 번 난간 없는 다리를 오갔다. 가끔 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춰 서서 물 위를 떠가는 것들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바위틈에서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종종 죽은 물고기들이 강가로 쓸려 나오기도 했지만 그리 많은 수도 아니었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죽은 물고기는 부리가 긴 흰 새들의 몫이었다. 누나에게 그 새의 이름을 물어본 적 있었다.
나도 몰라.
누나는 2층 침대의 아래 칸에 누워 대답했다. 재하와 누나는 한방을 썼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붙어 있는 좁고 단순한 구조의 집이었다. 재하와 누나가 함께 쓰는 방은 2층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뿐, 다른 가구가 놓일 여유조차 없었다. 하나뿐인 책상은 주로 누나가 사용했으나 사실상 거의 비어 있었다. 누나는 2층 침대의 아래 칸에서 방 안의 고요하고 답답한 시간들을 애써 견뎌냈다. 누나의 머리맡엔 두꺼운 양장본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미 누나가 다 읽은 책들이었다. 누나는 어떤 책이든 두 번 읽기를 싫어했다. 누나 주위에 아무렇게 내던져진 책들은 사실상 버려진 거나 다름없었다.
학인가? 그럴 리는 없겠지.
누나가 혼잣말을 하듯 뒤이어 중얼거렸다. 내게 줄 음료수를 찾느라 냉장고를 뒤지고 있던 재하가 두루미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나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아예 입을 다물더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침대 아래로 가느다란 팔이 툭 떨어졌다. 그런 누나를 바라보고 있자니 슬슬 화가 났다. 내가 재하 집을 들락거린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누나는 내게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내가 책의 줄거리를 꼬치꼬치 캐물을 때만 눈을 빛내며 길게 이야기할 뿐, 나에 대해선 전혀 궁금한 게 없다는 투였다. 누나가 내 이름을 알기나 하는지 캐묻고 싶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나는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고, 설령 내게 무슨 말을 건네더라도 항상 재하를 불러서는 재하와 나 둘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재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던질 때도 누나가 부르는 이름은 항상 재하였다.
재하야.
누나가 재하를 부르면 나도 모르게 재하와 함께 쪼르르 달려나갔다. 정작 누나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아직 읽을 때가 아닌 것 같아서요. 데미안은 조만간 한 번 더 읽어볼 생각이에요”라며 내가 읊어야 할 대사들을 대신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재하는 황당하고 귀찮은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죽대며 누나 앞을 도망치듯 떠났다. 나는 미적거리며 누나가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곁으로 오라는 손짓을 하지나 않을까, 눈치를 살피곤 했지만 누나는 항상 할 말만 하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고개를 툭 떨구고 침대 아래로 희고 가느다란 팔을 떨어뜨렸다.
처음엔 몰랐다. 누나의 행동들이 사실은 죽은 체하고 있던 거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재하를 부르는 누나의 목소리는 항상 낮고 음울했다. 게다가 한 음절 한 음절 길게 늘여 부르는 그 목소리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냈다. 아마도 그녀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고요한 위기에 처한 사람의 흉내를 매우 잘 해낸 탓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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