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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 소설 <보다 그럼직한 시체놀이> ⓒ이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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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진 소설 <6화>
재하는 나를 텔레비전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재하의 부모가 쓰는 방이었다. 나는 대자리가 깔린 요 위에 앉아 텔레비전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남의 집에 가본 게 처음이나 마찬가지여서 나는 방 안의 살림살이들을 신기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우리 집 안방과 달리 재하네 안방을 채운 가구들은 모두 키가 작았다. 좌식 화장대 앞에 놓인 방석은 난생처음 보는 거였다. 우리 집엔 방석이 없었다. 대신 쿠션 높은 의자들이 여러 개 있었다. 재하 목소리가 옆방에서 들렸다. 바로 옆방에 누나가 있었지만 누나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좀 이따가 재하가 능글능글 웃으며 안방으로 들어왔다. 누나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곧장 비디오테이프를 텔레비전 장식장에서 꺼냈다. 학교 앞 대여점에서 서너 개 빌려온 것들이었다. 재하가 뭘 보면 좋겠냐고 거듭 물어왔다. 나는 뭐든 좋다는 식으로 말했다. 자꾸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였다. 재하가 뱀파이어가 나오는 영화를 보자고 했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영화라는 말도 덧붙였다. 비디오테이프를 투입구에 넣었지만 바라던 영상은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철컥,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투입구 밖으로 나와버렸다. 재하가 테이프를 살펴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미리 되감기를 안 한 탓이었다. 테이프가 모두 되감아지길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재하가 영화의 줄거리를 두서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누나였다. 누나는 흰색 잠옷을 입고 문턱에 서서 나와 재하를 초점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목덜미를 감싸 쥔 채 미동 없이 서 있기만 했다. 재하가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나도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누나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목덜미를 쥐고 있던 손을 뗐다. 검붉은 피가 손바닥에 묻어 있었다. 목덜미에도 핏자국이 선연했다. 누나가 피 묻은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나는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곧이어 누나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재하가 씨발, 욕을 했다. 나는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누나의 손에 시선을 빼앗긴 채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재하가 다시 한 번 욕을 뱉었다. 엎어져 있던 누나가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돌아갔다. 재하는 방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훔쳐내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재하는 툭하면 욕을 뱉었고, 나는 영화 속 뱀파이어가 여자들의 목덜미를 물어버릴 때마다 누나의 웃음이 다시 들리는 듯 했다. 금방이라도 여주인공이 다시 일어서서 누나처럼 소리 내어 웃을 것만 같았다. 도무지 영화를 즐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재하는 욕하는 것 말고 달리 분을 참을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재하가 물었다.
너 혹시 총 있냐?
그러면서 옆방과 맞붙어 있는 벽에 대고 총 쏘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해 우리 또래 사이에선 비비총이 크게 유행했다. 문구사 주인아저씨들은 날마다 더 큰 총을 꺼내 남자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재하와 나는 비비총 따위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부류였다. 만약 우리가 비비총을 가졌더라면 보다 많은 친구를 사귀었을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그때와 영 달라졌다. 이제 비비총은 어딘가 좀스러운 데가 있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새를 잡고 싶거나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면 총을 겨눌 일이 아니라 주먹을 휘두르거나 차라리 돌멩이를 던지는 게 훨씬 나았다. 옛 생각을 하다 말고 나는 문득 재하에게 요즘 학교생활이 어떤지 물어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지난겨울 사이, 나보다 한 뼘 가까이 크게 자란 재하를 보니 어쩐지 그 질문은 내가 받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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