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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1 09:54 수정 : 2014.04.03 10:47

황현진 소설 <7화>



강둑을 따라 늘어선 비닐하우스에서 차례차례 불이 밝혀졌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재하가 낚싯대를 허공에 높이 치켜들고 빙빙 돌렸다. 낚싯대를 거두면서, 내게 내기를 하자고 말했다. 누나가 시체놀이에 빠져 우리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짐짓 멀쩡한 체하며 책이나 읽고 있을지. 재하는 재빨리 누나는 분명 죽어 있을 거라고 선수를 쳤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예외란 없었다.

나는 누나가 침대에 엎드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으로 책의 오른쪽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종종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책을 읽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정말로 누나가 그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누나의 머리맡에, 누나의 발치에, 누나가 팔을 뻗어 만질 수 있는 사정권 안에는 항상 책들이 난장판으로 뒤섞여 있었으니까, 내기의 승자는 내가 될 게 틀림없었다. 무엇을 내기의 담보로 걸어야 할지만이 중요했다. 나는 나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탓에 재하에게서 무엇을 뺏어야 할지 골똘할 수밖에 없었다. 재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생각에만 집중한 채 걸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머릿속에선 재하의 가난만이 더욱 두드러졌다. 재하 부모의 가난과 그들이 사는 동네의 쇠락함, 낡고 허름한 집과 후지다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가구들. 그 집에서 유일하게 새것인 책들은 이미 내 방에도 넘쳐났다. 누나를 달라고 해도 될까? 시체놀이에 빠져 있는 너의 누나에게 내가 키스해도 될까? 내가 너의 누나를 꼬드겨도 될까? 과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도 될까? 재하야, 세상에 정말로 해선 안 되는 일이 몇 가지나 될까? 나는 앞으로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묵인하고 침묵하겠다는 약속을 재하로부터 받아내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재하에게 원하는 단 한 가지였다.

내가 이기면 넌 내게 책을 주는 거야.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재하였다. 의외였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책? 책이라고 했어?

재차 물었을 때 재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걸음을 멈추곤 아랫입술을 씹으며 침을 삼켰다. 뭔가 대단한 결심을 스스로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사람처럼 재하의 입이 점점 한일자로 굳어갔다.

새 책을 사서 내게 줘.

나는 과연 이것이 오로지 재하의 진심인가, 의심스러웠다. 쉽게 그러자고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쉽게 그러자고 말할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내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재하는 곧장 알아챘다. 미안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안해.

놀랍게도 재하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제 진짜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누나에게 주고 싶어서 그래.

재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 따윈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투였다.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절박한 이유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런 제스처였다.

이대로 가면 누나가 정말 죽어버리겠다고 난리 칠 것 같아.

그러니까 재하는 알고 있었던 거다. 내가 누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과 시체놀이에 빠진 누나가 이젠 진짜 시체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을 만큼 놀이에 심취해 있다는 사실과 누나를 그 지독한 중독에서 빠져나오게 할 유일한 해결은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무한한 책들뿐이라는 사실과 이 모든 방법들이 차선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도 재하는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재하는 나 못지않게 누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문득 읽지 않은 책의 제목을 기억 못 하는 게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내 이름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누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재하의 친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재하의 입장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늘 그 이상을 바랐는데 말이다. 게다가 지금 재하는 내게 그 이하가 되기를 요구했다. 안 한다고 말할까? 그건 좀 어려운 일이라고? 처음으로 재하를 실망시키고 싶어졌다. 내가 재하의 제안을 탐탁지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을 재하는 금방 느꼈다. 그는 갑자기 말이 많아지고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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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황현진의 <보다 그럼직한 시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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