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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2 09:53 수정 : 2014.04.03 10:47

황현진 소설 <8화>



얼마 전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누나는 머리에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고 아버지의 소주를 다 마셔버리곤 침대에 처박혔다. ‘사실 소주를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빈 소주병이 침대 아래 놓여 있긴 했지만 누나는 원래 그런 연출에 도가 텄으니까.’ 잠결에 누나는 2층 침대의 위층 바닥을 걷어찼다.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불편한 잠을 자고 있던 재하가 그 기척에 놀라 깼다. ‘일부러 찬 건지, 모르고 찬 건지도 알 수가 없어. 누나가 정말 죽으려고 그랬는지, 새로 떠올린 기발한 시체놀이의 하나인 건지 나는 이제 그 둘을 구분할 수가 없어.’ 재하는 상반신을 내밀어 침대의 아래층을 들여다보았다. ‘누나의 얼굴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어. 목 아래만 있는 것 같았어. 밤이었으니까 말이야. 낮이었다면 검은 얼굴만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뭐가 더 끔찍했을까?’ 누나, 누나. 재하는 누나를 연거푸 불렀다. 사라진 얼굴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다. 봉지가 콧구멍에 들러붙었다가 겨우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놀란 재하가 거의 고꾸라지다시피 침대 아래로 풀쩍 뛰어내렸다. ‘검은 봉지를 잡아 뜯었을 때, 누나가 웃고 있었어. 헉헉 숨을 마시기 바빠 죽으면서도 킥킥 웃느라 바쁘더라고.’ 누나는 킥킥 웃다가 벌떡 일어나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읽을 책이 없었고 결국 누나는 찢어진 검은 봉지를 다시 주워들었다. 봉지를 들고 있다가 방바닥에 내버리곤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소주병의 라벨에 적힌 글자들을 유심히 읽더니 책상 서랍에 소주병을 넣었다. 재하는 침대에 걸터앉아 누나가 하는 짓을 모두 지켜보았다. ‘이제 그만 올라가. 누나가 그러더라고. 그래서 올라가서 자는 체했어. 아, 정말 미친년이야.’ 재하의 턱 밑이 부들부들 떨렸다. 재하는 겨우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사이에 재하의 집에 당도했다. 우리는 무척 심각한 얼굴로 집 앞에 멈춰 섰다. 나는 누나가 내게 했던 말을 곱씹는 중이었다. 누나는 분명 내게 ‘굳이 책을 읽으며 살 필요는 없어’라고 했다. 그 말은, 책을 읽고 안 읽고 따위는 살고 죽는 데 별 연관이 없다는 의미였지 않을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 죽겠다는 말과 동의어라 친다면, 책을 읽는 일이 책을 읽지 않는 일보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누나에게 책을 선물하는 일은 누나를 시체놀이의 위험한 연쇄로 더더욱 몰아넣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내 얼굴은 좀 전보다 더 심각해져서 아주 복잡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재하는 다시 턱 아래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재하가 나의 유일한 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나 역시 재하의 유일한 친구라는 사실도 변함없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진 것들은 다 유일했다. 유일한 아버지, 유일한 어머니, 유일한 친구. 그리고 재하에겐 내게 없는 유일한 무엇이 하나 더 있었다. 유일한 형제. 물론 나에게도 재하에게 없는 호명이 하나 더 있었다. 유일한 자식. 유일해서 잘 보이지 않는 나는, 온종일 집 밖에서 보내는 일상에 대체로 만족했다. 심지어 한낮에 혼자 집을 지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나를 매우 뿌듯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집을 지키는 유일한, 한 사람으로 거기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아예 거기 없었으니까. 어쩌면 우리가 사는 동안 가장 원하는 것은 서로에게 유일하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 오직 그뿐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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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황현진의 <보다 그럼직한 시체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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