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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7 10:38 수정 : 2014.04.09 10:13

정지돈 소설 <여행자들의 지침서> ⓒ이현경



정지돈 소설 <1화>



톰 매카시(Tom mccarthy)가 옥스퍼드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그가 옥스퍼드를 그만두고 베를린에 가지 않았다면, 베를린에서 스트리퍼를 하지 않았다면, 암스테르담에서 몸을 팔며 바텐더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은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말이다. 만약에 당신에게 만약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은 믿지 마라. 만약이란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다.

*

톰 매카시는 암스테르담에서 몸을 팔다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와 만났다. 사이먼은 대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대학원생으로 철학을 전공했으며 죽음과 남자, WWE에 관심이 많았고 손톱에는 늘 때가 끼어 있었지만 구두는 비싼 것만 신었다. 톰과 사이먼은 처음 만난 날 이후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의 취향이 아니었다. 사실 톰은 게이도 아니었다.

*

사이먼은 톰에게 소설을 써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톰이 그에게 고민 상담을 했기 때문이다. 톰은 당시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기이한 열정이 있어 아무것도 참지 못하거나 또는 참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사이먼은 알아듣지 못했다. 톰이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저는 어떤 일을 꾸준히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데 사실 꾸준히 하지 않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

톰의 그런 성향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떤 연인과도 두 달 이상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고, 관계를 유지 못 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했다. 반면 어떤 상황에서도 발기는 오래갔다(사이먼이 직접 확인했다).

중요한 문제는 톰의 욕망이었다. 톰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중요한 건 무엇을 욕망하느냐가 아니었다. 욕망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너야. 사이먼이 말했다. 톰, 그러니까 너의 상태는 이렇게 요약돼. 너는 a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야. 바꿔 말하면 너는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하고 싶지 않지 않은 것도 아니란 말이야. 너는 일종의 유빙(floating iceberg)이야. 깨어진 커다란 얼음 조각, 부서진 파편이자 찌꺼기, 녹아내리는 떠돌이 빙산. 욕망은 해류고 바다고 다른 빙산이며 심해고 북극곰이며 오로라야.

사이먼의 말에 톰은 뭔가 찌릿한 것을 느꼈다. 사이먼은 소설을 쓰는 것(또는 아무런 글이나)만이 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왜? 톰이 물었다. 써보면 알게 돼. 사이먼이 말했다.




정지돈(소설가)




정지돈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3년〈문학과사회〉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후장사실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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