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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4 09:39 수정 : 2014.04.17 10:03

정지돈 소설 <여행자들의 지침서> ⓒ이현경



정지돈 소설 <6화>



런던만큼 공중화장실 안내서가 발달한 곳도 없다. 서점에 가면 약 스무 종의 공중화장실에 관한 책을 찾을 수 있는데, 이들 모두 오직 런던의 공중화장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하나인 폴 그루스키(Paul Grusky)의 1923년 작 《누구의 편의를 위한 것인가?for whom it is beneficial?》는 공중화장실 안내서계의 고전으로 꼽힌다. 사이먼 역시 그 책을 가지고 있었으며 십 대 후반부터 책이 닳도록 반복해서 읽곤 했다. 사실 《누구의 편의를 위한 것인가?》는 공중화장실 안내서가 아니라 게이 섹스 헌팅 가이드북이었다. 공중화장실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긴 하지만 눈 밝은 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 폴 그루스키는 섹스하기에 적합한가 적합하지 않은가의 기준으로 화장실을 평가하며 섹스와 헌팅에 유용한 요소를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놀라운 사실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런던의 공중화장실은 거의 같은 곳에 있으며 그곳에선 여전히 온갖 종류의 게이들이 침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먼은 《누구의 편의를 위한 것인가》에 영향을 받은 철학책을 구상 중이었다. 섹스와 배변, 죽음이 얽힌 일종의 메타 철학서였는데, 책에는 화장실에서 죽었거나 화장실에서 섹스를 나누는 것을 즐긴 철학자의 목록이 전화번호부처럼 실려 있었다. 사이먼이 홀번(Holborn)의 공중화장실에 들른 그 날도, 그는 책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헌팅에 대한 생각도 그 못지않았지만 말이다.

홀번의 공중화장실은 빅토리아 왕조 시절부터 있던 것으로, 이제는 더 이상 화장실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런던에는 이런 폐기처분 직전의 화장실이 수도 없이 많았는데, 어떤 것은 역사적 이유로 어떤 것은 미학적인 이유로 철거를 하지 않고 두었지만, 홀번의 화장실은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사이먼이 추측하기에 시 당국의 담당자가 게이라서 철거를 미루고 있는 것 같았다.

안개가 짙은 밤이었고, 낮에 뿌린 비가 거리에 여전히 고여 있었다. 사이먼은 구두가 젖지 않게 주의하며 화장실 벽에 기대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안으로 들어갔다. 껌벅껌벅하는 형광등이 때에 찌든 타일을 음침하게 비췄다. 벽에 간 금 사이로 빗물이 스며 나왔다. 심장이 두근대고 귓가에 테크노 음악이 울렸다. 성기에 자연스레 피가 쏠렸다. 사이먼은 지저분한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수도꼭지에서 석회물이 똑, 똑 떨어졌다.

그때 끼익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 속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였다. 거울이 너무 지저분해 정확히 보이지 않았는데 굉장히 큰 키의 사내 같았다. 사이먼은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사내는 서서히 사이먼의 뒤로 다가왔다. 사내는 중절모와 프록코트 차림에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또각또각. 사내의 걸음 소리가 화장실에 울렸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유령이 분명해. 사이먼은 입을 벌렸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유령은 사이먼의 뒤로 바짝 붙어 섰다. 얼굴을 보려 했지만, 유령의 키가 너무 커 거울에는 목까지만 비쳤다. 유령은 손을 뻗어 사이먼의 허리를 붙잡았다. 문득 사이먼의 머릿속에 이 유령이 게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령은 손을 뻗어 사이먼의 바지를 끄르고 이어 자신의 바지를 끌렀다. 형광등이 짧은 간격을 두고 깜박였다. 절정에 오른 게이 유령은 지팡이로 화장실 천장을 쿵쿵 찔렀다. 믿을 수 없군. 사이먼은 세면대에 상체를 기댄 채 생각했다. 믿을 수 없이 좋군.

뭐랄까, 그건 죽음의 맛이었어. 사이먼이 말했다. 톰은 물끄러미 사이먼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군.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사이먼은 INS에 대한 구상을 지체할 수 없다고 했다. 이건 일종의 계시야.

빅토리아 왕조의 게이 유령 이야기는 사이먼과 톰, 둘만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단원을 모으고 홈페이지를 만들고 〈타임스〉에 광고를 냈다. BBC를 해킹했으며 터너상 전시장과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퍼포먼스를 펼쳤고 《Brief of INS》라는 책을 냈다. 호응은 미미했다. 사람들은 죽음에 무관심했고 아름다움에도 무관심했다. 바야흐로 때는 21세기였고, 런던은 명실상부 세계 제1의 금융도시가 되었다. 사이먼의 부모님은 본인이 죽기 전엔 죽음은 생각도 말라고 사이먼을 준엄히 꾸짖었다. 진보적인 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사이먼은 이 죽음은 삶을 가능케 하는 죽음이라고 항변했으나 부모와의 싸움에선 이길 수 없었다.

톰은 펀처 A에 관한 소설을 집어치우고 죽음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음 충동이라고 할 만한 어떤 충동에 관한 것인데, 소설 속 주인공은 반복적인 행위에 집착한다. 이를테면 섹스와 폭력, 면도, 금식, 급정거, 악수 따위 말이다. 톰은 바비컨 센터의 전용 자리에 앉아 뭔가에 홀린 듯 글을 쓰고 지우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꽤 두툼한 분량의 소설이 나왔는데, 내용은 하나도 연결되지 않았고 일차원적인 수준의 마조히즘과 사디즘의 나열, 바타유의 어설픈 모작 같은 졸작이 나왔다. 이러한 평가는 사이먼이 내린 거였다. 형편없군. 너도 유령을 만나는 게 좋겠어. 유령은 아직도 섹스를 반복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톰은 울화통이 터졌지만 사이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톰은 펀처 A에게 공중화장실의 게이 유령에 대해 말했다. 홀번에 가봐야겠어. 펀처 A는 스튜디오 바닥에 드러누워 톰의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모르니 이걸 가져가. 그의 주머니에서 스미스 웨슨 38구경이 나왔다. 톰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건 왜? 그 자식이 유령이 아니면 이걸로 쏴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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