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소설 <8화>
그들은 생 세브린가(Rue Saint Severine)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알폰소는 이번에도 카푸치노를 마셨고 톰은 소다수를, 클레멘타인은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톰의 소설 《찌꺼기》를 메트로놈의 보급판 픽션 시리즈의 첫 권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이건 21세기판 ‘여행자들의 지침서(traveller's companion)’가 될 거예요.
클레멘타인이 말했다.
‘여행자들의 지침서’요? 톰이 반문했다.
네. ‘여행자들의 지침서’죠. 클레멘타인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제 책은 여행이랑 상관없는데요.
‘여행자들의 지침서’는 올랭피아 출판사의 보급판 시리즈 이름이었어요. 모리스 지로디아스(Maurice Girodias)의 고육지책이었죠. 클레멘타인이 설명했다.
아. 톰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실은 모리스 지로디아스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여행자들의 지침서’가 왜 고육지책인지 알 수 없었으며 자신의 책이 왜 여행자들에게 지침서가 되는지 역시 알 수 없었다.
모리스 지로디아스는 훌륭한 사람이었지요. 알폰소가 톰의 생각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클레멘타인의 무릎에 얹었다. 클레멘타인은 알폰소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둘의 모습은 연인이나 부녀 관계처럼 보였는데, 다시 말하면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거나 어쩌길 원하지 않는 사이처럼 보였다. 제가 처음으로 낸 책이 ‘여행자들의 지침서’ 열네 번째 권이었습니다. 열세 번째 권이 크리스토퍼 로그(Christopher Logue)의 책이었고 열다섯 번째가 존 글라스코(John Glassco)의 책이었지요. 알폰소가 말했다.
아. 톰은 또 고개를 끄덕였지만 크리스토퍼 로그나 존 글라스코 역시 누군지 알 수 없었고 이제 알 수 없는 사람들 얘기는 그만했으면 싶었으며, 이들과 이야기할수록 자신이 여기서 책을 내려고 한 게 옳은 선택인지, 사이먼은 무슨 심보로 이들을 소개해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소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게 틀림없어. 톰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알폰소와 클레멘타인을 쳐다봤다. 둘은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들이 21세기에 도래한 위대한 출판인인지 부부사기단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초라한 몽상가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셋은 한 몸일지도 몰라. 톰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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